교권보호위원회에 출석하고 왔다.

교육지원청에서 열린 교권보호위원회에 출석하고 왔다. 내가 오랫동안 가르친 학생들이 온라인 공간에서 나에 대한 심각한 모욕적 발언을 했고, 그 내용에는 차마 언급할 수 없는 장애 비하 발언이 포함되어 있다. 심야 시간에 온라인 공간에서 일어난 발언이라 교육활동 침해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지만 내 해석은 그렇지 않다. 나는 교권보호위원회에서 내릴 수 있는 최고 수위 징계인 전학을 요구했다.

이 사건을 알고 나서 인권위에 전화 상담을 했을 때 인권위 진정을 하더라도 충분히 장애인 차별로 인정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도 가장 좋은 건 교육지원청에서 적절한 조치가 내려지는 것이리라. 교육 당국의 자정작용이 인권위나 사법기관을 거치지 않아도 될 만큼 견고하기를….

육아와 시험문제 출제, 장교조 일 등 쉴 새 없이 몰아닥치는 일들 때문에 이런 일에 감정을 소모하고 싶진 않았다. 당연히 유정에게도 이전까지는 얘기하지 않았고 오늘 회의에 출석하고 돌아와서야 이런 일이 있었다는 정도로 얘기했을 뿐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 스스로 피해자가 된다는 것 자체가 불편하고 거부감이 들어서 자꾸 회피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장교조 위원장으로 여러 곳에서 장애인교원이 겪는 고충을 얘기했지만, 이번에 확실히 느낀 것은 피해를 당하는 것과 ‘피해자’가 되어서 자신의 피해를 입증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되어 내게 벌어진 일을 곱씹고 관련 규정을 찾아서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나마도 장교조 활동 경험이 아니었다면 마음이 더 약해졌을지도 모른다. 장교조 위원장인 나도 막상 이런 일을 겪으면 회피하고 싶은데 다른 장애가 있는 선생님들은 어떨지 생각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학생을 사랑하는 마음과 잘못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책임을 지게 하는 건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중대한 잘못에 대해서 면책해 준다면 그것이 더 반교육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임을 제대로 지게 만들려면 피해자도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피곤하다. 이 글을 쓰는 것도 피곤하다. 내게 벌어진 일을 되새기는 게 무척 괴롭고, 소중한 시간을 이런 데 쓰는 게 아깝다. 그래도 이 또한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도 ‘장애인교원’으로 살면서 감내해야 하는 일이라면 감내하겠다.

📱 내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iPhone 앱: 시각 보조, 보행 및 교통, 금융, 가전 관련 앱 13개 👀

현재 기준으로 나의 iPhone 홈 화면에 있고 가장 자주 사용하는 앱을 소개합니다. 시각장애인은 앱을 사용할 때 접근성과 사용 경험(UX)이 매우 중요합니다. 소개하는 앱들은 iPhone의 스크린 리더인 보이스오버로 접근 가능할 뿐 아니라 화면 구성이 심플해서 사용이 간편합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시각 보조, 보행 및 교통, 금융, 가전 분야에서 사용하는 앱 13개를 모았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제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영어 콘텐츠 및 생산성 도구 분야의 앱 12개를 소개합니다. 그럼 먼저 저의 일상생활에서 꼭 필요한 앱 13개입니다.


Be My Eyes

시각장애인과 자원봉사자를 연결해 실시간으로 영상 통화를 통해 지원받을 수 있는 앱입니다. 전 세계에서 봉사자를 연결해 주기 때문에 24시간 사용 가능합니다. 미리 설정해 둔 언어로 봉사자를 연결하기 때문에 서로 말이 안 통할 걱정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도 해결이 안 될 때 찾게 되는 최후의 보루 앱입니다. 개인적으로 가게 입구를 찾거나, 컴퓨터 화면을 보거나, 도시가스 계량기 숫자를 볼 때 제일 많이 사용합니다. 최근에는 집안에서 로봇 청소기가 어디에 멈췄는지 찾는 데 사용한 적도 있습니다. 


Seeing AI

AI를 이용해서 시각 정보를 알려주는 앱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했습니다. 문서 읽기, 사물 인식, 사람과 표정을 인식하고, 주변 환경에 대한 설명을 제공합니다.

Be My Eyes가 봉사자를 연결하는 데 대략 30초 정도 걸리고 누군가 내 사적인 공간을 본다는 부담이 있다면, Seeing AI는 빠르고 사생활 침해 걱정이 없습니다. 짧은 텍스트의 경우 실시간으로 읽어준다는 것이 큰 장점입니다.


설리번 플러스

Seeing AI와 비슷한 기능의 국내 앱입니다. 투아트가 개발했습니다. 시각장애인의 독립적인 생활을 지원하는 AI 기반 앱으로 글자 인식, 색상 및 빛 감지, 사물과 얼굴 인식 기능을 제공합니다.

사진을 매번 찍어야 하는 점이 번거롭지만 화면 구성이 심플해서 편리합니다. 얼굴 인식 모드에서 나이를 젊게 이야기해 줘서 재미로 친구들과 가지고 놀기도 좋습니다.


Light Detector

빛을 감지하여 소리로 바꿔 줍니다. 밝은 빛은 높은음으로 어두운 빛은 낮은음으로 표현합니다. 앱을 실행하자마자 별다른 추가 동작 없이 바로 작동하므로 설치만 하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실수로 집안에 불을 켜둔 곳이 있는지 빨리 확인하고 싶을 때 쓸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자주 사용하지는 않지만 빛을 소리로 바꿔준다는 발상이 기발해서 보조공학기술의 대표적 사례로 자주 소개합니다.


보행자용 지도 내비게이션

보행자를 위한 길 찾기 앱으로 최적의 도보 경로를 제공해 목적지까지 안내합니다. 박정규님이 개발했습니다. 목적지까지의 거리를 미터로 표시해 주고, 가까워지면 실시간으로 미터 수가 1미터씩 줄어듭니다. 모퉁이를 돌아야 하거나 길을 건너야 할 때 10미터 전에 음성과 진동으로 알려주고 그 지점에 있는 상호도 알려줍니다.

대다수 내비게이션 앱이 접근성과 사용 경험이 좋지 않아 사용하기 어려운데 그에 비하면 혁신적입니다. 실제로 개발자가 시각장애인 사용자의 피드백을 반영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길을 갈 때 사용하면 방향 잡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다만 경로를 이탈하면 다시 현위치를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다소 소요되므로 아예 모르는 길을 갈 때 이 앱에만 의지하는 것은 안전상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나비콜바우처

서울에서 사용하는 장애인바우처 택시 호출 앱입니다. 바우처를 이용해 저렴한 비용으로 나비콜이나 온다콜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 앱을 사용하려면 먼저 주민센터에서 장애인 바우처 택시 서비스를 신청해야 합니다. 시각장애인, 신장장애인뿐 아니라 기존 장애인콜택시 회원도 사용 가능합니다.

최근에 이용자가 많아짐에 따라 콜센터 대기 시간이 길어져서 앱 사용이 필수가 되었습니다. 택시 위치가 지도에 뜨지만 보이스오버로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그러나 비시각장애인인 동행자가 있는 경우 이 기능도 유용합니다.


카카오지하철

지하철 이용자를 위한 앱으로 실시간 도착 정보, 최적의 경로 및 요금 정보를 제공합니다.

소요 시간을 정확히 알려줍니다. 무엇보다 역사마다 전화번호가 있어서 가고자 하는 역사에 도우미 신청을 할 때 유용합니다.


카카오T

택시 호출부터 대리운전, 주차장 찾기까지 다양한 이동 서비스를 제공하는 앱입니다.

개인적으로 나비콜택시가 잡히지 않거나 가까운 거리를 갈 때 가끔 사용합니다. 보이스오버로 접근 가능하지만 화면을 탐색할 때 포커스가 튀는 경우가 있어 사용 경험이 그리 좋지 않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장애인 할인 혜택이 없습니다. 꼭 요금 할인이 아니더라도 장애인 고객을 위한 서비스가 추가되고 UI 개선이 이루어진다면 더 많은 장애인 사용자가 이용할 것 같습니다.


토스

간편 송금, 금융 관리, 다양한 금융 상품 비교 및 가입을 지원하는 종합 금융 서비스 앱입니다.

접근성과 사용 경험 면에서 어떠한 금융 앱보다 뛰어납니다. 개인적으로 송금과 자산관리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앱입니다. 장애인의 날 이벤트로 점자 카드 쓰기 이벤트를 진행하는 등 높은 장애 감수성을 보여주어 사용자 평이 매우 좋습니다.


카카오뱅크

사용자 친화적인 인터페이스와 다양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터넷 은행 앱입니다.

여타 금융 앱들과 비교해서 화면 구성이 심플합니다. 통장 개설이 간단하고 모임통장 관리 등 다른 금융 앱에는 없는 기능도 있습니다. 거래 내역을 엑셀로 변환하여 저장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개인적으로 주거래 통장으로 사용하지는 않지만 경조사 때 입금 통장으로 사용해 본 결과 편의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KB스타뱅킹

KB국민은행의 모바일 뱅킹 앱으로 계좌 관리, 송금, 금융 상품 가입 등의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보이스오버로 접근이 용이하며 자산관리, 대출 상환 등 중요한 금융 업무를 충분히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창구에서는 몇 시간 걸릴 일을 단 몇 번의 탭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메뉴가 많고 복잡하여 사용 경험이 다소 떨어지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모바일 앱이 처음 나왔을 때와 비교하면 많은 부분이 개선되었습니다.


LG ThinQ

LG 가전 제품을 스마트폰으로 제어하고 관리할 수 있는 앱입니다. 집안에 있는 LG 가전을 WiFi로 연결해서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습니다. 

요즘 대부분의 가전이 터치 스크린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LG 가전을 사용한다면 필수로 설치해야 하는 앱입니다. 상태 변경, 예를 들어 세탁기의 세탁 종료나 냉장고 문 개방 알림 등을 실시간으로 알려줍니다. 리모콘이 없는 가전 제품의 경우 특히 유용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세탁이나 건조의 남은 시간을 확인하고 에어컨 설정을 세부적으로 조절할 때 많이 사용합니다. 다만 안전상의 문제로 인덕션, 세탁기, 오븐 등의 전원을 앱으로 켜거나 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나비엔 스마트 (구 나비엔 스마트톡 보일러)

경동 나비엔 보일러를 원격으로 제어하고 관리할 수 있는 앱으로 온도 조절, 에너지 사용량 모니터링 등의 기능을 제공합니다. 온도조절기를 집안의 WiFi로 연결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요즘 보일러 온도 조절기가 터치 스크린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비엔 보일러를 최신 모델로 교체하는 경우 사용하면 유용합니다. 회원가입과 연결이 번거롭지만 한 번 연결해 놓으면 인터페이스가 심플해서 사용하기 편리합니다. AI 스피커와 연동할 수 있고 집 밖에서도 온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온도를 스스로 정확히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만족스럽습니다.


이 13개 앱은 저의 독립적인 생활에 꼭 필요한 앱들입니다. 여러분이 사용하시는 일상생활 필수 앱은 무엇인가요? 추천하고 싶은 앱이 있다면 댓글로 공유해 주세요! 💬


주호민 사건의 진짜 비극

1. 지난 2월 1일, 주호민 사건의 1심 결과가 나왔다. 피고인 특수교사의 일부 발언이 정서 학대로 인정되어 200만 원 벌금의 선고를 유예한다는 결정이었다. 선고유예는 형의 집행을 미룸으로써 형 집행의 효과를 달성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유죄 선고가 없었던 효력을 갖게 하는 제도이다.


2. 경미하다고는 하지만 정서학대가 인정되었다는 점에서 유감이다. 학생에 대한 교사의 정서학대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어떠한 이유에서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장애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정서학대는 그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것이다. 이참에 아예 근절하여야 한다.


3. 이 점에 대해서 교사들도 인정할 건 인정하자.


4. 그러나 여기에서 멈출 순 없다. 우리 모두가 이 문제가 한 교사 개인의 일탈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사실 학교 전체가 공범이다.


5. 대한민국의 학교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학대와 차별을 자행해 왔는가? 장애학생을 특수학교 또는 특수학급에 가두고 그들을 분리시키려는 노력을 얼마나 열심히 수행하여 왔는가? 장애학생의 문제행동을 교육적으로 해결하는 대신 의료적 치료를 넌지시 권유하고 그들이 ‘전문가’라고 부르는 몇몇 사람들의 문제로 축소하지 않았는가?


6. 이번 사건도 다르지 않았다. 주호민 작가의 아이는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의 행동은 중재의 대상이지 처벌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학교는 처음에는 성폭력 가해자로 다루려고 했고, 전학시키라는 말도 안 되는 피해학생의 부모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했다.


7. 피해학생의 부모는 전학을 시킬 수 없으면 통합 시간을 최대한 줄여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장애아동을 격리하고 배제하려는 전형적인 차별적 발상이다. 당연히 피해 학생의 회복 지원은 학교가 할 수 있는 최대치로 이뤄졌어야 한다. 그렇지만 장애아동을 ‘가해자’로 낙인찍고 배제하려는 발상은 선을 넘은 것이다.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은 것이다.


8. 이런 야만에 가까운 발언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중재를 위해 노력한 것은 피고 특수교사뿐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 중재를 위하여 개별화지원팀 회의를 개최한 것이 특수교사였다. 여기서부터 문제이다. 장애아동을 지원해야 하는 책임은 학교 전체에 있지 특수교사 한 명에게 있지 않다. 애초에 학폭 사안으로 봤다면 더욱이 사건 해결의 책임은 특수교사에게 있지 않다. 사건 자체가 통합 학급에서 일어났다고 하지 않았는가? 담임교사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때 교장과 교감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회의에서 그들은 무슨 발언을 하였는가?


9. 학교가 비겁하다. 참으로 비겁하다. 지켜야 할 선도 지키지 못하고 특수교사에게 모든 일을 떠밀었다. 교육이 아니라 사건 처리를 맡겼다. 이것이 이 사건의 진짜 비극이다.


10. 학기 초부터 이런 어려운 일을 맡게 된 특수교사의 심정은 처참했을 것이다. 과도한 업무보다 더 비참한 것은 학교 내에서 아무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하고 모든 책임을 뒤집어써야 한다는 철저한 고립감이었을 것이다. 특수교사도 사람이다.


11. 특수교사에게 법적 책임이 있을지언정 도의적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학교 시스템이 고장나 있는데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 학교 구성원 모두에게 있다.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자는 돌을 던져라.


12. 나는 작년 서이초 사건부터 지속적으로 문제의 본질은 학교 밖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고 주장했다. 내가 학교 문화와 시스템이 주범이라고 보는 이유는 장애가 있는 교사들이 비슷한 문제를 매우 자주 겪기 때문이다. 학부모의 갑질이 아니더라도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하는 교사는 장애인 교사 중에도 많다. 청각장애인교원에게 상식적으로 이뤄져야 할 통역 지원이 이뤄지지 않고 보행상장애가 있는 교사에게 당연하게 이뤄져야 할 교통편의 및 근거리 배치가 이뤄지지 않고, 시각장애인 교사에게 가장 중요한 교재 및 업무 시스템 접근성 문제가 어디에서도 다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교육 활동에서 많은 문제가 생기는데 그것을 모두 개인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니 숨이 막히고 우울증에 빠진다.


13. 특수교사들도 차별적 대우를 많이 당한다. 아주 많이 당한다. 제발 학교가 할 일을 하자. 교사 개개인을 범죄자로 만드는 것은 바로 학교 운영을 책임지는 사람들이다. 인권과 권리가 뭔지도 모르는 후진 학교 문화와 시스템이다.


<참고 링크>


아래는 이 사건과 관련해서 2023년 8월 3일 자 슬로우뉴스에 기고한 칼럼이다. 이 글에서 나는 이 사건이 일반 학교에서 궁지에 몰린 장애 아동의 학부모와 그들을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특수 교사 사이에 벌어지는 전형적인 ‘생존 게임’의 양상을 띈다고 지적했다.

진짜 빌런은 학교다: 장애인 통합교육의 현실 - 슬로우뉴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컨벤션 센터의 장애인 응대 수준

유정과 내가 둘이 일정이 안 맞는 바람에 오래 전부터 가려고 했던 베이비페어에 함께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않은가. 다음 베이비페어는 출산 후가 될 텐데...

모처럼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이미 고마운 지인 새내기 부부들이 육아용품도 많이 보내주었고 유정이 미리미리 당근거래도 해놓은 터라 새로 살 물건이 많진 않았다. 육아 용품 구매보다는 정말 모처럼 부모님과 떠나는 나들이라는 기분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컨벤션 센터로 향했다. 강남 한복판에 있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컨벤션센터라면 장애인이 혼자서 쇼핑하는 것을 어느 정도는 지원하는 시스템이 있으리라. 게다가 박람회가 열리는 홀까지만 가면 박람회 안전 요원들의 도움을 받아서 충분히 혼자 쇼핑도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까지 모험은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보다는 베이비페어가 주는 그 활력과 꿈과 희망을 부모님과 함께 즐기고 싶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컨벤션센터와 박람회 안전요원들의 장애인 지원 시스템을 굳이 테스트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오늘은 나들이하는 날이니까. 만약 조금 더 도전 의식을 발휘했더라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컨벤션 센터와 베이비페어는 나 한 명쯤이야 충분히 지원해줄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기대하는 것도 과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것이 바로 자유주의 대한민국의 품격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그런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컨벤션센터의 장애인 응대 시스템은 내가 택시에서 내려서 부모님을 만나기까지 단 2분 사이에 냉혹한 현실을 철저히 자각하게 만들어주었다. 마치 내가 지난 30년 동안 장애에 관해서 잘 모르고 살았던 사람인 것처럼, 내가 어떤 장애를 가지고 있는지 제대로 알려주겠다고 작정한 것처럼 나를 대했다.

내게 일어난 일은 이것이다.


택시에서 나는 컨벤션 센터의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먼저, 상담원에게 베이비페어가 열리는 홀이 어느 쪽 문과 가까운지 물어 택시에서 내려야 할 위치를 정확히 확인했다. 상담원은 매우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다음으로, 조금 난이도를 높여서 나의 장애 상태를 설명하고 택시 하차 후 컨벤션 입구부터 홀까지 안내해 주는 서비스를 요청했다. 물론 그런 서비스를 명시적으로 안내받은 적은 없다. 그리고 정말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서비스를 거부할 것을 대비해서 이전에도 그런 서비스를 받은 적이 잆다고 덧붙였다. 상담원은 잠시 해당 팀에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확인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잠시 후 다시 연결된 상담원이 조금 난처한 목소리로 그런 서비스는 없는 것 같지만 일단 내 전화번호를 전달해주겠다고 얘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정말 이 정도 서비스가 없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담당 팀의 담당자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나에게 매우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객님, 이전에도 그런 서비스를 받았다고 하셨는데 아마 그때 안내를 제대로 못 드린 것 같아요. 저희는 그런 서비스가 없어요. 고객님을 지원하러 나가려면 그 사이에 누군가는 자리를 이탈해야 하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불가능해요.”

“아, 그런가요? 제가 분명 그런 서비스를 받았는데요.”

“아마도 그때도 안 되는데 저희가 해드렸던 것 같아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오늘도 도와드리긴 할게요. 할 건데 일단 이런 서비스가 없다는 건 알아 주시고 다음부턴 어렵다는 점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도착하시면 전화 주세요. 저희가 마중 나가겠습니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해서 담당 팀으로 전화했고 금세 안내요원이 나왔다. 입구 문을 열고 들어가서 몇 발자국을 더 가니 바로 베이비페어가 열리는 홀이 나왔다. 마침 바로 부모님이 나를 발견해서 내가 안내를 받은 시간은 채 30초가 되지 않았다. 내가 담당자와 통화한 시간과 안내를 받은 시간을 합하면 2분이 채 되지 않는다.

다행히 그 2분을 제외하면 이후의 일정은 아무런 문제 없이 스무스하게 흘러갔다. 부모님과 기분 좋게 박람회를 둘러보았고 기분 좋게 물건을 구매했고 우리 가족에겐 또 하나의 추억이 쌓였다. 하지만 나는 나의 장애를 뼛속까지 자각했다. 내 가슴에 남은 것은 또 하나의 상처다. 돌이켜 보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 부모님께 같이 가달라고 요청하면서 애써 나들이로 포장했다.

  실은 베이비페어에 혼자 갈 수 없다는 철저한 현실 인식이 아니면 애초에 부모님께 부탁을 안 했을 수도 있다. 나는 나를 기망했다.

• 상담원과 담당 직원에게 이전에도 서비스를 받았다고 신신당부했다.

  실제로 안내 서비스를 한두 번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한 이유는 서비스가 없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였다.

• 이번 한 번만 더 도와준다는 말에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실은 속이 쓰렸다. 다음 번에 서비스를 거절당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다른 장애가 있는 예비 부모일 수도 있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 그 짧은 2분 동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컨벤션 센터는 내가 컨벤션 센터에 혼자 올 수 없는, 혼자 와서는 안 되는 장애인이라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마치 명백한 진리인 양 설파했다. 이것이야말로 실질적인 장애 인식 개선 교육이 아닌가? 이래서 학교에서 하는 장애 이해 교육, 직장에서 하는 장애 인식 개선 교육은 다 위선이고 거짓인 것이다.

정작 장애인 당사자는 매일 같이 이런 ‘장애 인식 개선 교육’을 받으며 살고 있다.

헛웃음이 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컨벤션 센터가 이 정도 수준이라면 다른 수많은 행사장들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이 점을 일깨워주기라도 하듯 내 통화를 듣고 계시던 택시 기사님이 말씀하셨다.


“안내를 해준다니 코엑스는 다르군요. 제가 일산에 있는 킨텍스에 시각장애인 손님을 네 번 정도 모시고 갔는데 한 번도 전화 통화가 안 되더라고요. 매번 제가 안쪽까지 모셔다 드렸죠. 그래도 여긴 전화를 받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