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음성으로 듣기 - ElevenLabs
나는 6세에 시력을 잃었지만 맹학교와 사범대를 거쳐 교사가 되었다. 대학원에서는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2015년 봄, 벚꽃이 흩날리는 골목길에서 처음으로 팔짱을 끼고 걸었던 설렘이 생생하다. 우리는 이후 마다가스카르에서 유럽까지 세계를 여행하며 미래를 함께 그렸다.
7년의 연애 끝에 우리는 결혼했다. 하지만 장애 유전 가능성 때문에 이를 예방하기 위한 PGT 시험관 시술을 선택했고, 1년 만에 기적처럼 임신에 성공했다. 그리고 드디어 올 봄 건강한 아들 도도가 태어났다. ‘도도’는 모리셔스를 여행하며 우리 삶의 상징이 된 도도새에서 따온 태명이다.
도도가 태어나던 날, 나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격에 휩싸였다.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에 누워 있는 아내를 보면서는 여러 번 눈물을 훔쳤다.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많은 고생을 했지만 찬란한 생명 앞에서 아내는 마냥 행복에 겨워했다. 아내와 도도를 품에 안고 나는 든든한 남편이자 아빠가 되리라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곧 현실적인 고민이 찾아왔다. 8월 아내의 복직을 앞두고 내가 육아휴직으로 주된 양육을 맡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장애를 잘 길들이며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육아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고난도 과제였다. 봄부터 아내는 가사 지원이 가능한 활동지원사를 알아보라고 했다. 정작 나는 낯선 사람에게 우리 가족의 일상을 공개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망설였다. 하지만 도도를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백방으로 알아 본 끝에 7월 중순, 우리가 사는 강동구의 한 활동지원서비스 기관에서 T를 소개받았다. 처음 만난 날, T는 환하게 웃으며 도도를 품에 안았다. 진심으로 우리 가족을 이해하고 돕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날부터 T와 함께하면서 나는 조금씩 자신감을 얻어갔다. 물론 순탄치만은 않았다. 사고는 주로 내가 혼자 도도를 돌볼 때 일어났다. 한 번은 도도가 역류방지쿠션에서 미끄러져 모빌 받침에 부딪혔다. 또 한 번은 내가 한 팔로 아기를 안은 채 분유를 타다 도도를 의자에 떨어뜨렸다. 도도는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고 내 가슴도 철렁 무너져내렸다. 그때마다 T는 “부모가 다 그렇게 실수하면서 배워가는 거지유~”라며 넉넉한 미소로 위로해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의기소침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런 시행착오를 거치며 나는 아빠가 되어갔다. T와의 호흡도 점차 더 잘 맞았다. 이유식 때는 T가 음식을 떠먹여주는 동안 내가 도도를 붙잡아주고, 목욕 때는 T가 준비하는 사이 내가 물을 받는다. 함께 유아차를 밀며 도서관과 전통시장을 다닐 때면 T가 도도의 표정과 반응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도도가 방긋방긋 웃네요. 기분이 엄청 좋은가 봐요!” 이런 묘사를 들으면 어느새 내 얼굴에도 방긋 웃음이 떠올랐다. 4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T 덕분에 자신감 있는 아빠가 되었다. 여전히 실수투성이지만 중요한 건 내가 독립적으로 아빠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는 단순한 복지 제도가 아니다. 나처럼 중증 장애가 있는 사람도 주체적으로 양육에 참여하고 온전한 부모로 설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디딤돌이다. T와의만남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망설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뿐 아니다. T와 함께 낮 시간에 도도를 유아차에 태우고 동네를 다니다 보면 휴직 전에 가르쳤던 제자들과 마주칠 때가 있다. “선생님! 아기랑 산책 나오셨어요?” 아이들의 반가운 인사를 들을 때면 이제 나는 단순히 교사로서가 아니라, 한 아이의 아빠로서 이 지역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도도를 통해 나의세계도 함께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내도 T 덕분에 경력 단절 없이 직장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 부부는 자주 이야기한다. 도도가 우리에게 찾아온 것도 축복이지만, T를 만난 것 역시 도도가 준 또 하나의 선물이라고.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가 더 많은 장애인 가정에 가 닿기를 바란다. 이 서비스는 단순한 도움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가정과 사회를 연결하는 소중한 끈이기 때문이다. 이 제도를 운영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애쓰는 모든 분이 도도를 함께 키워주고 있다. T와 그분들께 이 글을 바친다.
* 이 글은 보건복지부 주관 2024 장애인 활동지원사업 우수사례 공모전 장려상 수상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