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자로서의 가족

여섯 살에 실명하고 가족은 언제나 세상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해 주는 번역자였다. 그중에서도 쌍둥이 형의 존재는 내가 세상을 경험하는 데 거의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 같다. 교회며, 시장이며, 병원이며, 미용실이며…. 형과 함께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곳에서 형은 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알려주곤 했다.


고등학생 땐 한참 유행하던 일본 애니메이션 ‘이누야샤’를 형과 함께 봤다. 형은 150화도 넘는 에피소드 자막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내게 읽어 주었다. 자막만 읽어준 것이 아니라 화면도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한 에피소드를 수도 없이 스페이스바를 누르며 보았던 것 같다.


한참 지난 언젠가 형이 자신은 자막을 읽어 주느라 애니메이션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것 같다고 얘기했을 때 그게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걸 처음 깨닫고 미안했던 기억이 난다. 그 정도로 내게 가족의 번역 노동은 당연했다.


그런데 이젠 내가 아빠가 되어 그때 형의 역할을 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도도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게 그림책을 들고 다가온다. 책장을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짚으며 내게 무언가 물어보는 듯한 몸짓을 할 때 과거, 애니메이션을 함께 봤던 형이 떠올랐다.


내가 그랬듯, 정작 도도는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모를 것이다. 그저 ‘무언가가 있다’라는 느낌만으로 ‘이게 뭔지 모르겠으니 알려 달라’는 엉성한 질문을 온몸으로 내뱉을 뿐이다. 형은 내가 답답함을 표현하면 금세 결핍의 정체를 파악하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형처럼 할 수 없다. 나는 도도가 보고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감할 준비도 되어 있고 설명 능력도 충분하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내 공감과 설명 능력은 빛 좋은 개살구가 된다.


그렇다면 나는 도도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도도에게 좋은 번역자가 될 수 있을까?


앞으로 이런 물음이 수없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아빠가 되어가는 과정이겠지.


도도와 놀며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한 추억이 많이 생각난다. 돌아보면 그 추억은 모두 BGM처럼 깔린 가족의 번역 행위 위에 있었다. 그 추억과 일상을 지나며 형도, 엄마도, 아빠도. 다 내 인생 최고의 번역자가 되어 갔다. 새삼 고맙고 미안하다.


마찬가지로 나도 지금은 어설프지만, 도도에게 둘도 없는 번역자가 되고 싶다. 비록 내가 그림은 보지 못하지만. 글쎄…. 다른 방식으로라도 말이다. 아마도 도도가 조금 더 크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해 주는 번역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인생은 큰 사이클을 돈다. 역할을 바꿔 가며, 서로의 번역자가 된다.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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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 되었다. 우리 부부는 교육 분야에 몸담고 있는 데다 올해는 도도가 어린이집에 처음으로 등원하기 때문에 이달이 꽤나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일상은 불완전한 선택과 시행착오의 연속이고 그날그날 해쳐 가야 할 일이 많아 버겁기만 하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는지 문득 지난 시절 우리 가족이 함께한 여행을 떠올려 보았다. 일상도 여행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행은 늘 우리 가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축이었다. 2017년과 2018년에 세 번에 나누어서 했던 마다가스카르와 모리셔스 여행은 연애 시기 유정과 내가 서로를 평생 함께할 동반자로 확신할 수 있게 해준 중요한 이정표였다. 그때 만난 도도새는 우리 아이의 태명이 되었고, 여행 중 쌓았던 수많은 추억은 이제 우리 가족만의 특별한 서사가 되었다.


코로나19가 사그라지던 2022년 봄에 방문한 제주도는 우리 부부에게 많은 추억이 깃든 곳이다. 우리는 7년의 연애를 끝내고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지였던 제주도는 아시아나항공 기내 방송 멘트처럼 “사랑과 낭만이 있는 섬”이었다. 그때의 황홀했던 추억을 맘 한 켠에서 만지작거리며 지난 12월에도 우리 가족은 제주도 여행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도도까지 셋이었다. 당시 생후 8개월이었던 도도는 비행기에서도 울지 않고 잘 버텨주었고, 숙소에서는 바닥을 열정적으로 기어다니며 우리 부부를 행복하게 해주었다(이 제주도 여행에 관해서는 시간이 허용하는 한 빨리 별도의 글로 풀어보려고 한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2023년 초의 쾰른-안트워프-암스테르담 여행은 또 다른 의미의 전환점이었다. 이 여행은 내가 실명으로 인해 30여 년 전 쾰른대학병원에서 눈 수술을 받았던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었다. 동시에, 새로운 꿈과 이상을 품게 해준 미래로의 여행이기도 했다. 유럽 도시들의 건축물과 문화적 풍경은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빛나는 순간들을 다시 한번 마주하게 해주었고, 유정에게는 이전까지의 회사 생활을 접고 출산을 결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2024년 4월, 우리는 도도를 건강하게 낳았고 도도가 타고난 복 덕분인지 유정도 2024년 말 교사로의 커리어 전환에 성공했다. 쾰른-안트워프-암스테르담 여행이 이 모든 행운의 시작점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도도의 탄생 이후에도 우리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지난해는 여름 방학을 이용해 평창과 계룡산으로 각각 1박 2일과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왔다. 비록 이전의 여행들에 비하면 짧은 거리였지만, 갓 신생아 시기를 벗어난 도도와의 첫 여행이었기 때문에 우리 부부에게는 꽤 큰 도전이었다. 시행착오가 없지 않았지만, 이제는 ‘여행의 달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유정 덕분에 새 식구와의 여행도 기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게다가 기어다니기도 전인 도도가 이렇게까지 협조를 잘해주는 것을 보며 우리 부부는 앞으로도 여행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여행은 개인 차원에서 그 자체로 잊을 수 없는 추억과 경험을 만들어 주고, 바삐 굴러가는 일상에 굵은 쉼표를 찍어줌으로써 숨 쉴 공간을 마련해 준다. 하지만 그동안 내게 여행은 개인보다는 공동의 경험으로서의 의미가 더욱 컸던 것 같다. 유정과의 여행은 매번 우리 둘의 관계를 다른 차원으로 데리고 갔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우리를 연결한 끈이 더욱 단단해졌고, 둘이서 더 큰 도전을 할 수 있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게 해주었고, 공동의 꿈을 꾸게 해주었다.


나는 유정을 ‘일상을 여행자처럼 살고, 여행을 일상처럼 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런 유정 덕분에 나도 넓은 세상을 탐험할 수 있었고, 내 인식의 지평도 함께 넓어졌다. 그리고이제는 도도까지 셋이 함께한다. 지난해에만 평창, 계룡산, 제주도로 즐거운 여행을 세 번이나 했다. 올해는 여행이 우리 가족을 또 어디로 데려갈까? 우선, 3월도 여행자처럼 유유히살아내면 좋겠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이 시기를 보내고 나면 여유롭게 또 다른 여행기를 써 내려갈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며 잠시의 상상 속 행복한 여행을 마무리한다.


※ 함께 보면 좋은 영상: 제리백에서 우리 부부의 여행 스토리를 멋진 영상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도도와 함께 찾아온 특별한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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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6세에 시력을 잃었지만 맹학교와 사범대를 거쳐 교사가 되었다. 대학원에서는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2015년 봄, 벚꽃이 흩날리는 골목길에서 처음으로 팔짱을 끼고 걸었던 설렘이 생생하다. 우리는 이후 마다가스카르에서 유럽까지 세계를 여행하며 미래를 함께 그렸다.

 

7년의 연애 끝에 우리는 결혼했다. 하지만 장애 유전 가능성 때문에 이를 예방하기 위한 PGT 시험관 시술을 선택했고, 1년 만에 기적처럼 임신에 성공했다. 그리고 드디어 올 봄 건강한 아들 도도가 태어났다. ‘도도’는 모리셔스를 여행하며 우리 삶의 상징이 된 도도새에서 따온 태명이다.

 

도도가 태어나던 날, 나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격에 휩싸였다.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에 누워 있는 아내를 보면서는 여러 번 눈물을 훔쳤다.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많은 고생을 했지만 찬란한 생명 앞에서 아내는 마냥 행복에 겨워했다. 아내와 도도를 품에 안고 나는 든든한 남편이자 아빠가 되리라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곧 현실적인 고민이 찾아왔다. 8월 아내의 복직을 앞두고 내가 육아휴직으로 주된 양육을 맡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장애를 잘 길들이며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육아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고난도 과제였다. 봄부터 아내는 가사 지원이 가능한 활동지원사를 알아보라고 했다. 정작 나는 낯선 사람에게 우리 가족의 일상을 공개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망설였다. 하지만 도도를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백방으로 알아 본 끝에 7월 중순, 우리가 사는 강동구의 한 활동지원서비스 기관에서 T를 소개받았다. 처음 만난 날, T는 환하게 웃으며 도도를 품에 안았다. 진심으로 우리 가족을 이해하고 돕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날부터 T와 함께하면서 나는 조금씩 자신감을 얻어갔다. 물론 순탄치만은 않았다. 사고는 주로 내가 혼자 도도를 돌볼 때 일어났다. 한 번은 도도가 역류방지쿠션에서 미끄러져 모빌 받침에 부딪혔다. 또 한 번은 내가 한 팔로 아기를 안은 채 분유를 타다 도도를 의자에 떨어뜨렸다. 도도는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고 내 가슴도 철렁 무너져내렸다. 그때마다 T는 “부모가 다 그렇게 실수하면서 배워가는 거지유~”라며 넉넉한 미소로 위로해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의기소침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런 시행착오를 거치며 나는 아빠가 되어갔다. T와의 호흡도 점차 더 잘 맞았다. 이유식 때는 T가 음식을 떠먹여주는 동안 내가 도도를 붙잡아주고, 목욕 때는 T가 준비하는 사이 내가 물을 받는다. 함께 유아차를 밀며 도서관과 전통시장을 다닐 때면 T가 도도의 표정과 반응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도도가 방긋방긋 웃네요. 기분이 엄청 좋은가 봐요!” 이런 묘사를 들으면 어느새 내 얼굴에도 방긋 웃음이 떠올랐다. 4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T 덕분에 자신감 있는 아빠가 되었다. 여전히 실수투성이지만 중요한 건 내가 독립적으로 아빠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는 단순한 복지 제도가 아니다. 나처럼 중증 장애가 있는 사람도 주체적으로 양육에 참여하고 온전한 부모로 설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디딤돌이다. T와의만남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망설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뿐 아니다. T와 함께 낮 시간에 도도를 유아차에 태우고 동네를 다니다 보면 휴직 전에 가르쳤던 제자들과 마주칠 때가 있다. “선생님! 아기랑 산책 나오셨어요?” 아이들의 반가운 인사를 들을 때면 이제 나는 단순히 교사로서가 아니라, 한 아이의 아빠로서 이 지역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도도를 통해 나의세계도 함께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내도 T 덕분에 경력 단절 없이 직장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 부부는 자주 이야기한다. 도도가 우리에게 찾아온 것도 축복이지만, T를 만난 것 역시 도도가 준 또 하나의 선물이라고.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가 더 많은 장애인 가정에 가 닿기를 바란다. 이 서비스는 단순한 도움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가정과 사회를 연결하는 소중한 끈이기 때문이다. 이 제도를 운영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애쓰는 모든 분이 도도를 함께 키워주고 있다. T와 그분들께 이 글을 바친다.


* 이 글은 보건복지부 주관 2024 장애인 활동지원사업 우수사례 공모전 장려상 수상작입니다.

행복한 하루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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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휴직을 하고서 정작 내가 제일 열심히 하는 일은 블로그 글쓰기이다. 그런데 글쓰기가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보니 주로 밤에 하게 되고 그러고 나면 낮에 낮잠을 자거나 해롱거리는 상태로 육아를 하게 된다. 내가 독박 육아를 했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시터님 한 분을 고용했고 활동지원사님도 가사 일을 전적으로 도와주시고, 양가 부모님도 심심찮게 와서 도와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

그러고도 육아를 위해 휴직한 게 맞냐고 누가 묻는다면 솔직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 같은 날은 블로그에 글을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자정을 넘어가는 찰나인데, 오늘 하루를 돌아보면 너무 행복해서 꼭 기록해 두고 싶기 때문이다.


오늘은 간만에 나도 유정도 아무 일정이 없는 날이었다. 시터님도, 활동지원사님도, 양가 부모님도 집에 방문하지 않았고, 오롯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 세 가족만의 시간이었다. 나는 이틀 전부터 감기에 걸린 탓에 하루 종일 거의 혼수 상태로 지냈고, 유정과 도도는 에너지가 넘쳤지만 그런 나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집안에서 잉여 에너지를 방출해야 하는 그런 날이었다.

유정은 오전부터 어린이대공원을 갈까, 강동 만화 거리를 갈까, 콧노래를 부르며 나를 쿡쿡 찔렀지만 나는 도저히 몸을 꿈쩍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내게 유정은 쯧쯧 하며 가벼운 몸놀림으로 도도의 책 선반이며 이유시 의자를 뚝딱뚝딱 만들었다. 그러다 오후 4시쯤 되자 비로소 나도 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도도는 하루 종일 참아 온 쾌변을 시원하게 보았다.

때는 이때였다. 오늘같이 날씨가 좋은 날 집에만 있는 것은 정말 몹쓸 짓이란 걸 집돌이인 나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동네 마실을 나섰다. 유정은 우리 셋이 마실을 나설 때면 늘 그렇듯 유아차 손잡이를 잡고 휘파람을 불며 앞장섰다. 나도 늘 그렇듯 유아차의 손잡이 한쪽 끝을 잡고 마치 유정과 같이 밀듯이, 하지만 실은 그저 손만 얹어놓고 유정의 오른쪽 약간 뒤에서 따라갔다. 그렇게 도도를 제일 앞장세우고 찌그러진 삼각형 모양으로 우리는 아파트 정문을 지나, 골목길을 지나, 행길로 나갔다. 몸 곳곳에서 감기로 다 죽어가던 세포들이 조금씩 살아나는 걸 느꼈다.


모처럼 동네 스타벅스에 앉았다. 도도는 집에서 한참 놀다 나와서인지 유아차에서 잠들었고 우리 부부는 토피넛라테와 딸기라테를 사이에 두고 여유롭게 마주 앉았다. 여기서 반전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딸기라테를 마신 게 유정이 아니라 나였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렇게 앉고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내가 "동네 할아버지처럼 배를 내밀고 허리는 숙인 채" 잠들어버렸다는 것이다. 방금 큰따옴표로 묶은 것은 유정이 후에 묘사해 준 나의 모습이었다. 몹시 모욕적이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그러고 꾸벅꾸벅 졸았다. 유정이 나와 도도가 스타벅스에서 함께 잠들었다가 도도만 혼자 깨어나서 노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스토리에 올린 후에야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우리는 다시 행길로 나섰다. 급할 게 없었으므로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유정이 부리토 집을 발견했다. 부리토라니. 선사문화유적지와 백제 문화재가 대거 출토된 전통의 강동구에서, 그것도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모습을 상당 부분 간직한 길동 거리에서 부리토라니. 몹시 반가웠다. 마침 어제 Dele 시험(스페인어 어학 시험)을 본 유정에겐 더 그랬다고!


부리토와 나초, 버팔로 윙을 사 들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때 우리 부부가 자주 다니던 위스키 바에서 종종 보던 동네 지인을 마주쳤다. 그 지인은 방금 스토리에서 잠들어 있는 나와 말똥말똥 깨서 노는 도도를 보았는데 길거리에서 만나니 너무 신기하다며 반가워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렇게 산책하며 동네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은 요즘 시대에 흔치 않으므로 우리 부부도 몹시 기뻤다.

집에 와서 부리토를 먹으며 기분이 한참 더 좋아졌다. 도도도 행복했는지 평소에 하지 않던 재미있는 발음의 옹알이와 귀여운 행동을 많이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우리 부부가 배꼽 잡고 웃는 순간이 찾아왔다. 도도가 한참을 어라운드-위-고를 타고 놀다가 내려왔는데 내가 가까이 가서 냄새를 맡아보니 도도가 오늘의 두 번째 쾌변을 본 것 같았다. 

나는 다가가 도도를 안으며 "언제 쌌어?"라고 부드럽게 물어봤다. 그러자 도도가 내 귀에 대고 "아까, 아까"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 겨우 7개월인 아이가 내 말을 이해했을 리는 없었다. 딱 적절한 타이밍에 딱 적절한 옹알이를 한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그야말로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이렇게 귀여운 옹알이라니.



그렇게 우리는 저녁 내내 웃으며 함께 뒹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도도와 유정은 9시가 조금 넘어 함께 잠들었다.

이렇게 평화롭고 행복한 날이 또 있을까? 비록 나는 감기에 고생했고, 유정은 그런 나 때문에 고생했겠지만, 그래도 세 식구가 함께여서 추억으로 남을 하루였다. 하루를 기록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유정과 도도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참 감사하다. 이런 사람들과 같은 지붕  아래 살고 있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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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아래는 이 블로그 글을 가지고 ElevenLabs에서 최근에 출시한 Gen FM이라는 기능을 활용해서 만들어 본 AI 팟캐스트입니다~ :)

https://elevenreader.io/app/reader/genfm/3fa05276f7bb33eda72a01d864f46cf845acbca33c31baa7ec49ddf25efc3daf/u:b6PpkBvLtFIbLLed6ujv

도도가 세례를 받았다

AI 음성으로 듣기 - ElevenLabs


도도가 J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생후 200일을 1주일 정도 앞둔 10월 13일이었다. 무신론자인 나에게도 세례식은 특별했다.

사진 설명: 제기동 성당에서 진행된 도도 이시도로의 세례식 장면이다. 나무로 된 강단 앞에 서 있는 유정과 헌용, 그리고 도도의 대부 테오도로의 모습이 보인다. 헌용이 안고 있는 도도가 대부님을 바라보고 있다. 가족 모두가 정장 차림으로 특별한 날의 의미를 더하는 분위기이다. - Described by Claude

한 사람이 특별한 공로나 조건 없이 어떤 커뮤니티로부터 받아들여지고 환대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의례로 공식화한다는 것은 강렬하게 따뜻한 경험이다. 더군다나 천주교는 이렇게 받아들여진 신자에게 성인의 이름을 딴 세례명을 선사한다. 세례받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세례명의 주인공인 성인과 동일시하며 그 삶의 궤적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천주교인 사람들끼리 만나면 꼭 서로 세례명을 물어보곤 한다. 마치 그로부터 서로의 삶의 태도에 대한 힌트를 얻기라도 하는 것처럼.
도도의 세례명은 이시도로이다. 세비야의 성인 이시도로(Isidore of Seville)는 축일이 도도의 생일과 가깝기도 하거니와 그의 삶은 우리 부부와 많이 공명한다. 6세기~7세기 세비야의 대주교를 지냈고 「어원론(Etymologiae)」이라는 당대의 백과사전을 펴내어 중세 유럽의 지식 전수와 교육에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언어에 관심이 많아 통번역을 전공했고 이젠 각각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영어와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우리 부부와 통하는 대목이다. 그런가 하면 성 이시도르는 방대한 정보를 분류하고 체계화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인터넷과 프로그래머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진다고 하는데 이 또한 힙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세례명을 이시도로로 결정한 것은 에스파냐의 정열을 가지고 있고, 도도의 ‘도’라는 글자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유정에겐 무척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사진 설명: 세례식의 핵심 순간을 포착한 장면이다. 흰색 제의를 입은 신부님이 의식을 진행 중이며, 신부님에 가려 유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헌용이 도도 이시도로를 안고 있고, 도도 이시도로는 신부님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옆에 서 있는 대부 테오도로가 미소를 지으며 도도 이시도로를 바라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경건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 Described by Claude

세례식은 유정의 고등학교 절친이기도 하면서 직장인 밴드 보컬이기도 한 C의 아기 D와 함께여서 더 특별했다. 생년월일이 겨우 10주밖에 차이 나지 않는 두 남자아이가 같은 날 함께 세례를 받으니 세례식 내내 가족들의 기쁨이 두 배가 되었다. 도도의 대부가 되어준 테오도로는 제기동 성당에서 유정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청년으로 이젠 나와도 인연이 깊다. 만날 때면 늘 남다른 센스로 나를 잘 챙겨줄 뿐 아니라 취미로 베이스 기타를 친다는 흔치 않은 공통점도 있다. 사실 TMI를 밝히자면,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메인 베이스 기타는 테오도로로부터 중고로 구매한 것이다! 아무튼 좋은 날, 좋은 사람들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는 자리여서 더 행복했다.
한편 세례를 받는 도도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세례식 내내 내 품에 얌전히 안겨 있었고 가끔은 신부님의 말씀에 “아아아아~ 어어어어~”라고 추임새를 넣으며 화답해 주었다. 아마도 기분이 나쁘진 않은 것 같았다. 도도가 훗날 이 블로그 글이나 사진을 보면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때 다시 물어봐야겠다.
세례식 후에는 장인어른의 모교를 방문해 산책을 했다. 계획에 없던 일정이었는데 J동성당에서 멀지 않고 지형 경관이 넓게 탁 트여 있어 나도 유정도 도도도 모처럼 기분 좋은 캠퍼스 나들이를 했다. 봄 같이 포근한 날씨였다. 기후 변화로 아기를 마음 놓고 데리고 나갈 수 있는 날이 점점 줄어드는데 마침 적절한 제안을 해 주신 장인어른께 감사했다. 이렇게 도도가 세례를 받은 특별한 날이 가족과의 추억으로 잘 마무리되었다.
원래는 세례의 종교적 의미와 환대라는 주제로 이 블로그 글을 쓰려고 했지만 도도를 키운 후로 심오한 주제로는 글을 쓰기가 어렵게 되었다. 깊이 골몰할 만큼의 짬이 잘 안 나거니와, 아무리 심오한 생각을 한다 한들 애초에 도도의 성장을 바라보며 느끼는 경이로움만큼의 감흥이 내 안에서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언급만은 꼭 남기고 싶다. 서두에 썼듯 조건 없이 누군가로부터 환대받는 것은 놀랍도록 강렬한 경험이다. 이 세상의 종교가 부디 모두에게 그런 강렬한 환대를 베풀어주었으면 좋겠다. 그야말로 어떠한 조건이나 차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