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하루의 기록

AI 음성으로 듣기 - ElevenLabs

육아 휴직을 하고서 정작 내가 제일 열심히 하는 일은 블로그 글쓰기이다. 그런데 글쓰기가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보니 주로 밤에 하게 되고 그러고 나면 낮에 낮잠을 자거나 해롱거리는 상태로 육아를 하게 된다. 내가 독박 육아를 했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시터님 한 분을 고용했고 활동지원사님도 가사 일을 전적으로 도와주시고, 양가 부모님도 심심찮게 와서 도와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

그러고도 육아를 위해 휴직한 게 맞냐고 누가 묻는다면 솔직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 같은 날은 블로그에 글을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자정을 넘어가는 찰나인데, 오늘 하루를 돌아보면 너무 행복해서 꼭 기록해 두고 싶기 때문이다.


오늘은 간만에 나도 유정도 아무 일정이 없는 날이었다. 시터님도, 활동지원사님도, 양가 부모님도 집에 방문하지 않았고, 오롯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 세 가족만의 시간이었다. 나는 이틀 전부터 감기에 걸린 탓에 하루 종일 거의 혼수 상태로 지냈고, 유정과 도도는 에너지가 넘쳤지만 그런 나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집안에서 잉여 에너지를 방출해야 하는 그런 날이었다.

유정은 오전부터 어린이대공원을 갈까, 강동 만화 거리를 갈까, 콧노래를 부르며 나를 쿡쿡 찔렀지만 나는 도저히 몸을 꿈쩍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내게 유정은 쯧쯧 하며 가벼운 몸놀림으로 도도의 책 선반이며 이유시 의자를 뚝딱뚝딱 만들었다. 그러다 오후 4시쯤 되자 비로소 나도 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도도는 하루 종일 참아 온 쾌변을 시원하게 보았다.

때는 이때였다. 오늘같이 날씨가 좋은 날 집에만 있는 것은 정말 몹쓸 짓이란 걸 집돌이인 나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동네 마실을 나섰다. 유정은 우리 셋이 마실을 나설 때면 늘 그렇듯 유아차 손잡이를 잡고 휘파람을 불며 앞장섰다. 나도 늘 그렇듯 유아차의 손잡이 한쪽 끝을 잡고 마치 유정과 같이 밀듯이, 하지만 실은 그저 손만 얹어놓고 유정의 오른쪽 약간 뒤에서 따라갔다. 그렇게 도도를 제일 앞장세우고 찌그러진 삼각형 모양으로 우리는 아파트 정문을 지나, 골목길을 지나, 행길로 나갔다. 몸 곳곳에서 감기로 다 죽어가던 세포들이 조금씩 살아나는 걸 느꼈다.


모처럼 동네 스타벅스에 앉았다. 도도는 집에서 한참 놀다 나와서인지 유아차에서 잠들었고 우리 부부는 토피넛라테와 딸기라테를 사이에 두고 여유롭게 마주 앉았다. 여기서 반전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딸기라테를 마신 게 유정이 아니라 나였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렇게 앉고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내가 "동네 할아버지처럼 배를 내밀고 허리는 숙인 채" 잠들어버렸다는 것이다. 방금 큰따옴표로 묶은 것은 유정이 후에 묘사해 준 나의 모습이었다. 몹시 모욕적이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그러고 꾸벅꾸벅 졸았다. 유정이 나와 도도가 스타벅스에서 함께 잠들었다가 도도만 혼자 깨어나서 노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스토리에 올린 후에야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우리는 다시 행길로 나섰다. 급할 게 없었으므로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유정이 부리토 집을 발견했다. 부리토라니. 선사문화유적지와 백제 문화재가 대거 출토된 전통의 강동구에서, 그것도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모습을 상당 부분 간직한 길동 거리에서 부리토라니. 몹시 반가웠다. 마침 어제 Dele 시험(스페인어 어학 시험)을 본 유정에겐 더 그랬다고!


부리토와 나초, 버팔로 윙을 사 들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때 우리 부부가 자주 다니던 위스키 바에서 종종 보던 동네 지인을 마주쳤다. 그 지인은 방금 스토리에서 잠들어 있는 나와 말똥말똥 깨서 노는 도도를 보았는데 길거리에서 만나니 너무 신기하다며 반가워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렇게 산책하며 동네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은 요즘 시대에 흔치 않으므로 우리 부부도 몹시 기뻤다.

집에 와서 부리토를 먹으며 기분이 한참 더 좋아졌다. 도도도 행복했는지 평소에 하지 않던 재미있는 발음의 옹알이와 귀여운 행동을 많이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우리 부부가 배꼽 잡고 웃는 순간이 찾아왔다. 도도가 한참을 어라운드-위-고를 타고 놀다가 내려왔는데 내가 가까이 가서 냄새를 맡아보니 도도가 오늘의 두 번째 쾌변을 본 것 같았다. 

나는 다가가 도도를 안으며 "언제 쌌어?"라고 부드럽게 물어봤다. 그러자 도도가 내 귀에 대고 "아까, 아까"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 겨우 7개월인 아이가 내 말을 이해했을 리는 없었다. 딱 적절한 타이밍에 딱 적절한 옹알이를 한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그야말로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이렇게 귀여운 옹알이라니.



그렇게 우리는 저녁 내내 웃으며 함께 뒹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도도와 유정은 9시가 조금 넘어 함께 잠들었다.

이렇게 평화롭고 행복한 날이 또 있을까? 비록 나는 감기에 고생했고, 유정은 그런 나 때문에 고생했겠지만, 그래도 세 식구가 함께여서 추억으로 남을 하루였다. 하루를 기록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유정과 도도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참 감사하다. 이런 사람들과 같은 지붕  아래 살고 있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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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아래는 이 블로그 글을 가지고 ElevenLabs에서 최근에 출시한 Gen FM이라는 기능을 활용해서 만들어 본 AI 팟캐스트입니다~ :)

https://elevenreader.io/app/reader/genfm/3fa05276f7bb33eda72a01d864f46cf845acbca33c31baa7ec49ddf25efc3daf/u:b6PpkBvLtFIbLLed6uj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