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결산하는 일은 참 어려운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런 것 같다. 하지만 2023년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작성한 엑셀 일지 덕분에 내가 뭘 하면서 정신없이 보냈는지 정리할 수 있었다.
유정과 한 해를 돌아보며 우리가 이렇게 많은 일을 함께했다는 사실에 놀랐고 큰 틀에서 잘살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2023년 나의 삶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었다.
첫째,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이 늘었다. 유정은 출산 준비를 위해 2월에 직장을 그만두고 3월부터 근처에 있는 외국어고등학교에 프랑스어 교사로 출강을 나가기 시작했다. 평생 남들의 2배, 3배 인생을 살던 유정에게 강동구라는 테두리 내에서 삶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게 해결되는 생활은 그동안 미뤄두었던 삶의 여유를 한꺼번에 가져다주었다.
신체적으로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는 유정에게 너무나 필요한 라이프스타일이었고 그것을 위해 유정은 직장을 그만두는 결단을 해야 했다. 7월에 찾아온 도도는 그런 엄마의 결정에 완벽히 부흥하는 선물이었다.
우리 가족은 셋으로 늘었다. 그리고 도도를 중심으로 우리의 삶은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아침과 저녁 배 속에 있는 도도와 대화를 나누고 집밥을 자주 먹고 양가 식구와도 자주 본다. 지난 9월에는 호주에 사는 사촌 누나네가 한국을 방문해서 함께 봤고 11월에는 유정 외가에 가서 김장을 했다. 12월엔 이젠 전통이 된 처가에서의 1박 크리스마스 파티도 했다.
둘째, 유정과 함께하는 퀄리티 타임이 늘었다. 유럽 여행처럼 긴 여행도 있었고 건강을 위한 동네 마실도 자주 나갔다. 공연이나 전시도 정리하고 보니 이렇게 많나 싶을 정도로 많이 보았다.
강동아트센터와 올림픽공원, 어린이대공원 등 생활권에 문화생활이 가능한 곳이 많은 이점을 십분 활용한 덕분이었다. 음악을 취미 또는 직업으로 하는 지인 찬스도 많이 썼다. 도합 18번이나 공연 또는 전시를 보았다. 사실 비싼 티켓으로 가는 공연보다 로컬에서 싸게 본 공연이 더 많았고 그래서 더 좋았다.
동네에서 공연을 본 날엔 어김없이 우리 동네에 처음 생긴 위스키 바인 스킵먼데이에 들렀다. 자주 가다 보니 역시 로컬에서 아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 또한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셋째, 음악 프로젝트가 다양해졌다. 정기적인 합주 연습이 줄어든 반면 단기 프로젝트가 늘었다. 유정과 ‘베란다 긱’ 같은 프로젝트도 시작했고 이전에 함께 근무했던 음악 선생님의 제안으로 교사밴드를 구성해 서울교육청 예술몽땅축제에 출전하기도 했다.
가장 신박한 건 12월에 시작한 프로젝트인데 미국에 살고 있는 지인이 제안한 원격 연주 녹음 프로젝트이다. 지인은 아들과 Son & Dad's Weekly Garageband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계시는데 전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과 원격 프로젝트를 많이 하신다. 덕분에 유정과 나도 홈 레코딩 장비를 본격적으로 연결하고 녹음했다. (결과물은 1월 중에 나올 예정)
음악은 아마추어치고도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평생의 취미는 된다. 특히 음악은 삶이 힘들 때 구원처럼 다가온다. 2023년에도 어김없이 여러 번 나를 절망에서 끄집어내어 삶의 트랙으로 다시 올려놓곤 했다. 아니, 반대일지도 모른다. 풍파가 정신없이 몰아칠 때 잠시 삶의 트랙에서 나를 끌어내어 쉴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넷째, 덕질을 열심히 했다. 내가 평생 열심히 하는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나를 둘러싼 세상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2023년은 인공지능의 발전이 티핑 포인트에 도달한 해였다. 하지만 챗봇이라는 텍스트에 기반한 전통적인 방식으로 찾아올 것이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공지능에서 시작한 덕질은 브라우저 덕질, 음성 기술 덕질, 오디오 에디팅 덕질로 이어졌고 연말에는 테스트해 본 서비스가 50개를 넘었다. 인공지능 쪽에서 유명하다 하는 건 접근성이 허용하는 한 다 테스트해 보려고 노력했다. 챗봇, 이미지 생성기, 동영상 생성기, 그리고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데모 서비스들도 한 번씩은 써 봤다.
그런데 인공지능 툴 10개를 테스트하면 그중에서 실제로 구독료까지 내면서 지속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건 한두 개뿐이다. 그나마도 내가 영어교육에 종사하다 보니 유용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비영어권 국가에서 일반인이 일상생활에서 유의미하게 사용하기까지는 아직 2~3년의 숙성 기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그런데 이미 완숙 단계에 있는 산업이 있다. 바로 구독 기반 저널리즘 산업이다. 내가 덕질한 또 다른 분야가 바로 이건데 오터레터, 커피팟, 슬로우뉴스 등 한국인에게 맞춤화된 뉴스 플랫폼부터 뉴욕 타임즈와 이코노미스트 같은 영어권 최강 뉴스 플랫폼까지 모두 열혈 구독자가 되었다. 여기에 Google 앱이 매일 보여주는 맞춤화된 뉴스들까지. 2023년에 나의 뉴스 소비 채널이 모두 디지털로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장애인 교사로서 나의 전문성이 어느 정도는 인정받는 한 해였다. 2023년에는 교육공동체벗이 나를 빡시게 단련시켰는데 <별별 교사들> 출간부터 네 차례에 걸친 격월간 오늘의 교육 칼럼 기고를 통해 장애인 교사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가 확보되었다. 여기에 슬로우뉴스에서 주호민 사건을 다룬 나의 페이스북 글을 칼럼으로 게재해 준 것도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무의의 홍윤희 이사장님은 나를 성수 헤이그라운드에서 열린 루트임팩트의 체인지메이커 컨퍼런스에 데뷔시켜주셨다.
하지만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해준 기반은 바로 다름 아닌 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장교조)이었다. 장교조는 세계 유일의 장애인교원으로 구성된 교원노동조합이다. 2023년에는 창립 4년 만에 교육부와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기염을 토했고 연말에는 조합원과 후원회원을 합쳐 회원 수가 200명을 넘겼다. 감사하게도 장교조의 비전과 가치에 공감해 주는 분들이 그만큼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이다. 이젠 교육부와 교육청은 물론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등 유관 기관들에서도 장교조의 존재를 대부분 알고 있다.
장교조는 양적으로만이 아니라 질적으로도 단단해지고 있다. 장교조를 운영하는 집행부를 구성하는 선생님들의 장애 유형은 2023년에 시각, 청각, 지체, 뇌병변장애로 다양해졌다. 성별도 남성 60% 여성 40%로 어느 정도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집행부는 장교조의 대표성을 띠기 때문에 조합원 구성을 최대한 반영하는 것이 좋은데 그 점에서 대표로서 늘 신경 쓰고 있고 아직까지는 성공하고 있다. 그리고 직역 특성상 조합 내에 정신장애가 있는 선생님은 거의 없지만 2023년에는 ADHD가 있는 선생님도 조합원으로 가입해 주셨다.
다양성과 포용성은 교육의 기치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장애인이 모인 단체여서가 아니라 다양성과 포용성이라는 가치를 내건 단체이기 때문에 우리의 활동은 보편성을 획득한다. 개별성이 강한 정체성을 가진 선생님들이 장교조 내에서 어우러질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보편적 가치를 조합 내에서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이 2023년 한 해 동안 나를 아주 많이 성장하게 해주었다.
이렇듯 2023년 나의 삶은 가족과 보내는 시간 증가, 유정과의 퀄리티 타임 증가, 음악 관련 프로젝트의 다양화, 테크놀로지와 저널리즘 덕질, 장애인 교사로서의 활동 기반 확보라는 다섯 가지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정말로 많이 성장한 해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성장에는 반드시 아픔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 리포트에는 좋은 이야기만 담았다. 하지만 2023년은 시련과 아픔도 많은 해였다. 도도가 찾아오기까지 우리 부부가 감내해야 했던 고생(주로 유정이 감내하고 나는 서포트하는 입장이었지만), 퀄리티 타임과 여러 프로젝트의 양립을 위해 잠을 줄여가며 무리하다가 세 번이나 몸져누웠던 일, 장교조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내홍, 그리고 랜덤하게 발생하는 여러 사건·사고들. 어쩌면 제3자에게는 그런 이야기들이 훨씬 더 도움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복기하는 일은 좋은 일을 복기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들다.
그래서 아마 2023년의 어두운 순간들을 이런 한 편의 리포트로 정리하는 일은 실현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내 엑셀 일지에는 찬란한 순간보다 어두운 순간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과거를 미화시키는 인간의 본성에 충실하며 이 리포트를 썼다.
2024년에도 많은 좋은 일과 그것보다 많은 힘든 일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년에도 이런 성장 리포트를 쓸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내게는 후회와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유일한 힘, 그러니까 희망이다. 그래서 이 리포트는 이렇게 마무리하려고 한다.
희망을 품게 해준 2023년이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