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E 리뷰] 업무에서 어떤 AI를 사용해야 할까? 개인적 경험을 기반으로 한 Top 4 유료 AI 모델/서비스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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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나는 2022년 12월부터 ChatGPT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AI 서비스를 다양한 업무, 특히 내가 위원장으로 있는 노동조합 업무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조합원 200명 규모의 노동조합에서 나는 사무행정, 대외 소통 및 홍보, 정책자료 분석 및 개발, 예결산 등 회계 업무까지 조직 운영 전반을 총괄하고 있어서 기획서 및 보고서 작성 업무를 상시적으로 수행한다. AI는 이제 업무 수행에 있어 보조적 수단이 아니라 기본적 업무 도구가 되어가고 있다.

LLM 기반의 첨단 AI 모델/서비스 가운데 Top 4로 볼 수 있는 ChatGPT, Claude, Gemini, Perplexity 모두 유료 사용자이며, 특히 앞의 세 서비스는 구독 서비스가 등장한 시점부터 사용해왔다. 단순 업무 효율화뿐 아니라, 시각장애인으로서 일상 업무와 정보 접근성을 높이는 보조 기술로서도 AI 모델/서비스를 많이 활용한다. 주변에 보면 아직 AI를 업무에 깊이 있게 활용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이 글은 AI를 실제 업무, 특히 노동조합 실무나 장애로 인한 어려움을 보완하는 데 활용하고자 하는 분들께 내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작성했다. 전문적인 기술 리뷰는 아니며, 철저히 경험에 기반한 리뷰이다.

AI 모델/서비스별 리뷰

Gemini

  • Google은 지난 3월 말 Gemini 2.5 Pro를 무료 사용자에게까지 확대했다. 2.5 Pro는 이전 버전에 비해 확실히 개선되었다. 원래도 2.0 Pro를 종종 사용했지만, 컨텍스트 윈도우가 크다는 점 외에는 ChatGPT(o1 모델)나 Claude(3.5 Sonet) 대비 뚜렷한 강점을 느끼긴 어려웠다. 그런데 2.5는 다르다. 지식이 풍부하고 영리하며, 글의 뉘앙스까지 잘 파악한다. 최근 복잡한 보고서 작성에 활용했는데 몇 턴의 대화를 이어간 끝에 거의 최종본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보고서를 만들 수 있었다.
  • 긴 컨텍스트 처리 능력은 특히 중요한 강점이다. 100쪽이 넘어가는 보고서를 통째로 분석하거나, 여러 규정/자료를 동시에 참고해 기획안을 작성해야 할 때 Gemini는 거의 유일한 대안일 때가 많다. 이는 방대한 정보를 한 번에 처리하기 어려운 시각/인지 장애 사용자에게 문서 이해도를 높이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 Deep Research 기능도 주목할 만하다. 얼마 전 최근 현안에 대한 심층 보고서를 생성했을 때 참조 소스가 400개를 넘어가는 것을 확인했다. 웹 인터페이스의 스크린리더 접근성은 매우 좋은 편이며, 최근 추가된 캔버스 기능도 아직 충분히 테스트해보진 못했지만 기본적인 인식은 가능한 수준으로 보인다.
  • 한줄평: 대규모 문서 작업 및 심층 분석에 강점을 보이는 조력자이다.
  • 용도: 장문 보고서/정책자료 분석 및 생성, 심층 연구 및 Q&A 생성, 요약문 생성

Claude

  • Anthropic은 2월 말 대표 모델을 3.7 Sonet으로 업그레이드했다. 기존 3.5 Sonet 성능이 워낙 우수해서 기대가 컸지만, 3.7 Sonet은 일부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지시 따르기(instruction following) 능력이 이전보다 저하된 것으로 느껴진다. 대화가 길어지면 맥락을 놓치는 현상도 더 자주 나타난다. 가장 큰 단점은 extended thinking을 켜도 간단한 숫자 계산에서 실수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면 예결산 검토 등 조합의 재정 관련 업무에는 신뢰하고 사용하기 어렵다. 모델 선택 메뉴에서 3.5 Sonet을 고를 수 있지만, 이 역시 이전 버전과는 차이가 있다.
  • 하지만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UI의 직관성과 안정성 면에서 Claude는 여전히 가장 뛰어난 업무 도구 중 하나이다. 'Projects' 기능은 조합의 연간 사업 계획, 재정 관리, 또는 창립 기념식 행사 준비처럼 여러 단계와 맥락을 가진 복잡한 업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결과물 검토 도구인 'Artifacts' 기능은 스크린리더 접근성이 준수하여 시각장애인 사용자도 편리하게 활용 가능하다. 또한 Windows와 macOS용 데스크톱 앱을 제공하여 웹 브라우저보다 안정적인 접근성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는 인지적 부담을 줄여주어 다양한 사용자가 편하게 사용할 수 있다.
  • 한줄평: 체계적인 업무 관리에 가장 안정적인 워크스페이스이다 (숫자 계산 제외).
  • 용도: 프로젝트 관리(사업 계획, 재정 관리, 행사 준비 등), 일상 업무 문서 초안 작성 및 검토, 아이디어 구상

ChatGPT

  • OpenAI의 ChatGPT는 모델별로 용도가 뚜렷하다. 지난 해 5월 출시 이래 꾸준히 업데이트된 4o 모델은 개념 설명이나 정보 조사에 강하고, 12월 정식 출시된 o1 모델은 심층적인 주제 탐구와 설득력 있는 글쓰기에 탁월하며, 올해 1월 말 출시된 o3-mini-high 모델은 숫자나 코딩 관련 작업에서 뛰어난 정확성을 보인다.
  • o1 모델의 글쓰기 실력은 이전 프리뷰 버전과 비교해 대폭 향상되었고, Gemini를 제외하면 문체가 다른 어떤 LLM보다도 자연스럽다. 특히 정서적 호소와 논증이 모두 필요한 성명서 등의 작성에 유리하다. Claude가 보고서 작성에 탁월하다면 o1은 에세이 스타일에 탁월하다.
  • o3-mini-high 모델은 (내가 주로 사용하는 조합 예산 계산이나 간단한 웹사이트 HTML 코드 수정 범위 내에서는) 숫자나 코딩에서 아직 오류를 보지 못했다. 답변 생성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지만, 정확도가 중요한 문서 작업에서는 가장 나은 대안이다.
  • ChatGPT는 대화 내용을 기억하는 '메모리' 기능이 뛰어나 Projects 기능을 꼭 사용하지 않아도 업무에서도 어느 정도 사용자의 맥락에 맞게 대화가 가능하다. Claude처럼 Windows와 macOS용 데스크톱 앱을 제공하여 접근성 면에서 이점이 있다. 다양한 모델 제공은 사용자가 자신의 정보 처리 방식이나 작업 종류에 맞는 도구를 선택할 유연성을 준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 하지만 UI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프로젝트 관리 기능은 다소 미흡하고, 아이디어 구상 도구인 '캔버스' 기능은 키보드 접근성이 매우 나빠 스크린리더 사용자에게는 사실상 사용이 불가능하다.
  • 한줄평: 특정 분야별 전문성이 뛰어난 다재다능한 동료이다.
  • 용도: 개념 명확화 및 조사, 설득적 글쓰기(성명서, 연설문 등), 회계 보고서 생성 및 코드 작업

Perplexity

  • Perplexity는 내가 가장 늦게 유료로 업그레이드한 AI 서비스이다. Pro 업그레이드 후엔 주로 AI 모델을 Claude 3.7 Sonet으로 놓고 쓴다. 답변 속도와 품질을 고려했을 때 이 조합의 궁합이 제일 잘 맞는 것 같다. Perplexity는 LLM 자체 개발보다 RAG(검색 증강 생성) 기술에 강점이 있는 기업으로, 웹 검색 기능이 매우 강력하다. 이러한 검색 능력과 3.7 Sonet의 비추론과 추론 사이의 균형 잡힌 특성이 결합될 때, 최신 정보 기반의 깊이 있는 답변을 얻는 데 시너지가 난다. 특히 최신 정책 동향이나 언론 보도 등을 빠르게 파악해야 하는 노조 활동에 유용하다.
  • iPhone의 음성 모드는 이동 중이거나 키보드 사용이 어려울 때 원하는 정보를 가장 빠르게 얻는 수단으로, 접근성 측면에서 매우 유용하다. 웹 인터페이스의 스크린리더 접근성도 준수하고 Claude나 ChatGPT처럼 Windows와 macOS용 데스크톱 앱이 별도로 있다. 최신 정보를 빠르게 요약/제공하여 정보 검색에 드는 시간과 노력을 줄여준다는 점은 많은 사용자, 특히 정보 검색에 제약이 있는 사용자에게 큰 장점이다. 주로 업무 초기 단계의 자료 조사나 보도자료 작성을 위한 현안 분석에 Perplexity를 활용한다.
  • 한줄평: 최신 정보 접근성과 빠른 검색에 최적화된 도구이다.
  • 용도: 초기 자료 수집, 최신 동향/현안 분석, 정책 트렌드 조사 등

농구로 비유하자면

위 AI 모델/서비스별 리뷰를 이해하기 쉽도록 농구 포지션으로 비유해 보겠다.

  • Claude: 포인트 가드. 팀의 중심이 되는 워크스페이스. (단, 계산은 가끔 놓침)
  • Perplexity: 스몰 포워드. 발 빠른 정보력으로 다방면에 도움 주는 어시스턴트.
  • ChatGPT: 파워 포워드. 특정 분야(글쓰기, 코딩 등)에서 압도적인 능력 발휘.
  • Gemini: 센터. 평소엔 조용하지만 결정적일 때(대용량 분석, 심층 연구) 제 몫을 톡톡히 함.

[TFE 리뷰] 2025년 2월 AI 기반 음성 서비스 업데이트 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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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기반 음성 기술의 발전이 눈부시다. 음성 인식, TTS(text-to-speech), STT(speech-to-text), 음성 대화 등 음성 기술의 다양한 측면이 고르게 발전하고 있다. 2025년 2월 한 달 사이에 나온 주요 서비스의 업데이트 소식과 실제로 사용해 본 경험을 요약했다.

  • 마이크로소프트 코파일럿: 2월 25일부터 음성 대화 중 실시간 정보 검색이 가능해졌고 반응 속도도 매우 빨라졌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24년 3월에 감성 인공지능으로 유명했던 Inflection AI를 사실상 인수했다. 이후 PI AI의 뛰어난 음성이 탑재되었지만, 한동안 실시간 정보 검색이 되지 않아 활용도가 낮았다. 요 며칠 사용해 보니 정확도도 높고 답변의 속도와 길이도 적절했다. 4개의 음성 중 선택할 수 있고, 다중 언어 지원이 되며, 한 세션 안에서 언어를 바꿔가며 대화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무료 사용자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 펄플렉시티 AI: 2월 26일, iOS 앱에 새로운 음성 모드가 추가되었다. 6개의 음성 중 하나를 고를 수 있고, 한국어와 영어 모두 테스트해 봤는데 매우 자연스럽다. 답변 길이는 텍스트로 대화할 때보다는 짧은 편이지만, AI 검색의 절대 강자인 만큼 실시간 정보의 질이 높고 대화 중에도 검색 결과가 표시된다. 음성 모드 인터페이스가 매우 깔끔하고 기존 음성 모드에서 거슬렸던 튀는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다중 언어 지원이 되지만, 한 세션 안에서 언어를 바꿀 수 없고 앱 언어 설정을 무조건 따라간다는 건 조금 아쉽다. 안드로이드와 macOS에도 곧 업데이트될 예정이라고 한다.
  • 구글 제미나이: 음성 대화 중 실시간 정보 검색이 가능하고, 한 세션 안에서 언어를 바꾸어 가며 대화할 수 있다. 영어와 한국어 모두 자연스러운 음성이고 영어는 선택할 수 있는 음성이 10가지이다. 2월 12일, 방언과 억양, 번역 기능 등이 향상되었다는 뉴스가 있지만 한국에도 적용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른 AI에 비해 답변의 질은 조금 떨어지는데 이는 음성보단 AI 자체의 문제로 보인다. 조만간 챗GPT와 마찬가지로 실시간 영상 스트리밍이 가능해질 예정이어서 기대가 크다.
  • ElevenLabs: 2월 27일, Scribe라는 STT 모델을 출시했다. 네이버의 클로바노트나 다글로와 같이 음성을 텍스트로 변환해 주는 서비스이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오픈AI의 Whisper, Deepgram의 Nova-3, Assembly AI 같은 제품들이 정확도가 높다고 평이 좋은데 대부분은 개발자가 API로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여서 일반 사용자들에겐 접근성이 떨어진다. 그런데 이번에 ElevenLabs가 출시한 Scribe는 API와 웹 인터페이스 모두에서 지원된다. 사용해 보진 않아서 실제 성능은 확인하지 못했다.
  • Hume AI, HeyGen: 2월 26일에는 Hume AI가, 2월 27일에는 HeyGen이 각각 텍스트 프롬프트로 음성의 특징을 미세 조정할 수 있는 기능을 발표했다. Hume AI는 Octave라는 별도의 플랫폼을 출시했는데 '첫 번째 스피치-언어 모델'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Hume AI는 감정이 풍부한 AI 음성 대화로 유명한 회사인데 Octave는 복잡한 음성 세팅 대신 우리에게 익숙한 챗봇 스타일의 텍스트 프롬프트만으로 감정, 성격 등 각종 음성의 특징들을 조정할 수 있게 했다. 다만 한국어 지원이 안 되고 ElevenLabs가 선점하고 있는 시장이라서 어느 정도로 성장할지는 미지수이다. HeyGen은 대표적인 AI 영상 생성 플랫폼으로 이미 텍스트 프롬프트로 다양한 영상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고급 기능을 지원한다. 이번 2월 업데이트에는 음성의 특징까지 미세 조정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 가장 큰 업데이트이다.

나는 AI 기반 TTS 서비스인 Speechify의 충성도 높은 사용자이다. 그리고 챗GPT에 고급 음성 모드와 실시간 비디오 스트리밍 기능이 추가된 후에는 챗GPT를 일상적인 시각 보조 앱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AI 음성 기술의 발전은 Be My Eyes나 Seeing AI와 같은 기존 시각 보조 앱들의 성능 향상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앞으로 음성 기술이 더욱 고도화되고 보편화되어 장애인의 정보접근권과 삶의 질 향상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길 기대한다. 🌟

※ 관련 글: [TFE 리뷰] 귀가 즐거워지는 AI 음성 서비스 Top 10 🎧

[TFE 리뷰] 카카오가 만든 점자 달력 - 접근 가능한 아날로그 달력의 의미 (달력 소개 영상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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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하단에 달력 소개 영상이 있습니다.


들어가며

 

12월 초, 카카오에서 온 우편 봉투를 열었다. 점자 달력이 들어 있었다. 여느 우편처럼 우선 급한대로 뜯자마자 내용물만 확인하고 책상 한 켠에 올려놓았다. 시각장애인인 내게 달력이란, 연말마다 돌아오는 의례적 물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특히 기관이나 단체에서 받는 달력들은 대개 머지않아 종이쓰레기가 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틈틈이 달력을 꺼내보며 만듦새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 있었다. 카카오 점자달력은 곳곳에 숨겨진 매력이 있다. 그에 관해서는 이 글 후반에서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 달력이 내 내면에 일으킨 작은 파문에 관해 얘기해 보려 한다. 달력이 내 책상 위에서 공간을 물리적으로 점유한다는 것의 의미,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점, 시간을 기록하는 행위의 가치, 왜 하필이면 카카오라는 회사가 이 사업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추측 등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물리적 존재가 만드는 리추얼

 

달력이 내 책상 위에 자리를 잡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책상에는 컴퓨터와 점자정보단말기와 같은 전자제품이 많아 달력을 위한 물리적 자리를 마련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로 27cm, 세로 20cm, 두께 8cm라는 만만치 않은 크기의 탁상형 달력을 수용하기에 내 작업 공간은 너무 비좁았다. 처음에는 접힌 채 서류 더미 사이에 끼워 두었다가, 내가 많이 오가는 주방 아일랜드 위로 옮겼다가, 다시 책상 위 손이 닿는 위치로 옮기는 시행착오를 반복했다. 이 과정은 조금 귀찮았지만 묘하게 달력에 대한 애착을 심어 주었다. 달력을 향해 일부러 자리를 비워주는 행위가 어쩐지 달력과 나 사이에 작은 관계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이후에는 이틀에 한 번 정도 손을 뻗어 달력을 만지게 되었다. 물리적으로 공간을 점유한 달력이 주는 효과는 예상밖으로 컸다. 달력이 항상 그 자리에 있음으로서 마치 내 작업 흐름에 시간을 부여하는 느낌을 준 것이다. 눈에 자주 띈다는 것-내게는 손에 자주 걸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것에 관해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는 의미니까. 책상 위에 달력의 공간을 마련한 것은 그래서 단순한 정리가 아니라 내 작업 흐름에 얼마간의 변화를 주는 행위였다.

문득 ‘시각장애인에게 달력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느리지만 깊이 있는 촉각의 경험, 색다른 방식의 시간 기록, 그리고 그 뒤에 ‘정보접근권’이라는 자못 해묵은 이슈까지. 이 달력이 내 삶에 던진 화두는 연말마다 의례적으로 주고받는 종이 달력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느리지만 깊이 있는 ‘촉각’의 경험

 

촉각으로 달력을 보는 일은 분명 번거롭다. 일정이 궁금하면 캘린더 앱을 열거나 심지어 음성 명령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시대다. 굳이 페이지를 넘기고 손끝으로 날짜를 더듬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나 또한 초기에는 이 달력의 존재를 자주 잊어버리곤 했다.

그러나 촉각으로 날짜를 확인하고, 촉각 스티커를 붙이는 과정을 반복할수록 오히려 이 느린 과정의 흡인력을 느끼게 되었다. 손끝으로 칸을 따라가며 날짜를 확인하는 동안, 나는 마치 시간을 손으로 더듬어 짚어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몇 번의 스와이프나 탭으로 빠르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직접 ‘만지고’ 확인하는 경험이 머릿속에 사색의 틈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점자의 질감은 그 사색에 구체적인 감각을 더해주었다.

특히 촉각 스티커를 붙일 때가 가장 인상적이다. 디지털 캘린더에서는 몇 초 만에 일정을 추가할 수 있지만, 점자 달력 앞에서는 “여기에 붙일까, 저기에 붙일까?”, “이 모양을 붙일까, 저 모양을 붙일까?” 하고 손끝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그 덕분에 일정에 대한 기대감이나 부담감도 더 구체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귀로 한번 휙 듣는 것과는 다른, ‘천천히 스며드는 몰입’이 촉각 달력을 통해 가능해졌다.

카카오 점자달력은 단순한 정보 도구를 넘어, 시각장애인인 내가 손끝으로 날짜를 확인한다는 행위 자체를 특별한 경험으로 바꾸어 놓았다. 손끝으로 날짜를 찾고, 때로는 아무 메모도 없는 빈 칸을 더듬으며 지난 하루나 곧 다가올 일을 천천히 떠올리는 시간. 이 느린 동작은 단순히 스케줄을 확인하는 절차가 아닌, 일상의 작은 의식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이나 PC에서 캘린더 앱을 열고 일정을 확인하던 것보다는 훨씬 느린, 그래서 오히려 더 럭셔리한 습관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시간 기록에 대하여

 

한편, 나는 2020년부터 4년 넘게 ‘Eat That Frog’라는 이름의 엑셀 파일에 매일 일지를 기록해 왔다.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습관 형성과 관련된 책의 제목이자 ‘개구리를 꼭 먹어야 한다면 아침에 먹어라.’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에서 따 온 이름의 이 엑셀은 처음에는 중요한 일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든 메모장이었다. 달력의 형태로 손수 만들었던 이 일지에 나는 빼곡히 하루의 일과를 정리해나갔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미래 일정보다도 과거의 일을 기록하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이게 되었다. 자기 성찰을 돕는 ‘사색의 도구’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쌓이니 내 삶의 패턴과 생각을 고스란히 담은 기록물이 되었다.

그런데 2024년 4월, 아들 도도가 태어나면서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을 시간이 줄었다. 게다가 가족이나 주변인들과 일정을 공유해야 할 일이 늘어났다. 나는 자연스럽게 구글 캘린더로 넘어갔다. 디지털 환경에서 실시간 협업과 공동 관리를 하기에는 구글 캘린더만큼 편리한 도구도 없었다. 구글 캘린더는 접근성이 매우 좋았다. PC에서는 단축키 몇 개로 일정을 저장할 수 있었고, 네이버 클로바나 구글 홈과 같은 AI 스피커에서는 음성으로 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스마트폰이나 한소네 6과 같이 다양한 스마트 디바이스와 실시간으로 매끄럽게 연동되었다. 엑셀도 디지털 도구이긴 했지만 개인적 기록에 초점이 있었다면 구글 캘린더는 완전한 웹 기반으로 주로 현재나 가까운 미래의 일정을 주변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도구로 매우 유용했다.

엑셀과 구글 캘린더를 사용하면서 깨달은 것은 시간을 기록하는 도구에 따라 시간을 대하는 태도 또한 달라진다는 사실이었다. 엑셀 일지가 과거를 중심으로 깊이 있는 자기 성찰을 가능하게 했다면, 구글 캘린더는 나의 현재를 나만의 소유물이 아니라 주변인과의 공동의 자원으로 보게 했다. 그렇다면 점자 달력을 사용하는 것은 시간에 관해 어떤 태도를 갖게 할까? 아직 사용한 지 2주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효용성을 여기서 미리 뭐라고 한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한 건 시간을 조금 더 소중하게 다루도록 한다는 점이다. 느리지만 집중적인 ‘기억의 의식’은 날짜 칸에 스티커를 붙이는 것과 같은 단순한 작업에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했다. 그 효과는 2025년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더 풍성하게 느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왜 하필 카카오였을까?

 

그렇다면 이 점자 달력을 만든 것이 왜 현대자동차나 삼성전자가 아니라 카카오였을까? IT기업이면서도 디지털 플랫폼의 최전선에 있는 카카오가 굳이 점자 달력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이야말로 디지털 기술의 잠재력과 한계를 가장 잘 인지하는 이들이 내놓은 역설적이면서도 합리적인 해법처럼 보이기도 한다.

카카오는 오래전부터 접근성을 위한 기술 투자에 힘써 왔다. 2013년부터 카카오는 QA 단계에서 접근성 전담 조직을 운영했고, 2018년부터는 자회사 링키지랩의 접근성팀을 통해 관련 업무를 수행했다. 2022년 4월에는 국내 IT 기업 최초로 '디지털 접근성 책임자(DAO)' 직책을 신설하면서 김혜일 링키지랩 접근성팀장을 선임했다. 이후 카카오톡에서는 저시력 사용자를 위한 고대비 테마 제공, 이모티콘에 대체 텍스트 추가, 이미지/동영상 파일 저장 시간 음성 출력 기능 등을 잇따라 구현했다. 카카오맵은 교통약자를 위한 이동 정보를 안내하고 있고, 지하철역 승강장의 단차 정보까지 제공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 중이다. 같은 맥락에서 도입된 카카오톡 지갑 인증서의 접근성 인증 마크 획득은 금융 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던 장애인의 삶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준 대표적 사례이다. 이처럼 카카오는 ‘배리어 프리 이니셔티브’라는 이름 아래 전사적 차원의 접근성 개선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이처럼 디지털 접근성 개선의 프런티어에서 일하는 조직이었기에 어쩌면 디지털 기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았을까? “기술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카카오는 오히려 아날로그 방식을 통해 시각장애인의 감각 경험을 확장하는 용감한 시도를 했다. 그리고 그 시도는 사용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카카오 점자달력은 한정판으로 출시되어 시각장애인들 사이에서 ‘허니버터칩’로 불릴 만큼 인기가 높았던 것이다.

접근성이란 결국 사람의 감각과 습관, 그리고 정보가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달려 있다. 카카오가 새로운 디지털 캘린더 접근성 기능을 출시하는 대신 점자 달력을 제작하게 된 것은 ‘기술을 통한 해결’이 아니라 ‘기술을 넘어서는 해결’을 지향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는 시도가 일종의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다시 카카오의 코어 기술을 더욱 강화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요컨대, 디지털(正)의 성과와 아날로그(反)의 감각적 이점을 융합해 ‘합(合)’을 도출함으로써, 카카오는 접근성이라는 본질적인 과제를 더욱 입체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기술을 넘어서는 해결’은 단순히 새로운 제품 하나를 내놓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용자 중심의 문제 해결력과 기업 내부의 기술력 모두를 성장시킬 수 있는 선순환의 출발점이 되어 줄 것이다.

 

카카오 점자달력, 설계부터 배포까지의 세밀함

 

그럼 이제 구체적으로 카카오 점자달력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고 어떤 특징이 있는지 설명하겠다. 카카오에서 발표한 ‘2025 카카오 점자달력 제작기’를 토대로 한다.

카카오는 3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많은 기획 회의와 100번이 넘는 테스트, 다양한 시각장애인 사용자와의 상담 과정을 통해 점자 달력을 준비했다고 한다. 제작팀은 우선 시각장애인들의 실제 사용 패턴에 주목했다. 시각장애인용 달력이 갖춰야 할 기본 요건인 점자 외에도, 저시력자를 위한 큰 글자와 4.5:1의 명도 대비를 적용했다. 국내 등록 시각장애인 중 점자 사용이 가능한 비율이 9.6%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내 주변에 달력을 받아 본 사람들은 저시력자는 물론 비장애인도 ‘숫자가 커서 시원시원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여기에 더해 각 페이지 하단에는 손끝으로 쉽게 구분할 수 있는 영역 구분선을 넣고 그 아래 최대 8개의 기념일을 모아서 표시했다. 매 주 토요일 칸 옆에는 음력 날짜를 함께 표기했다. 각 페이지 뒷면에는 촉각으로 인식 가능한 카카오프렌즈 캐릭터를 배치했다. 카카오프렌즈 캐릭터를 촉각으로 표현해 낸 것도 신박한 아이디어였지만 기념일과 음력 날짜 정보를 확인하기 편한 위치에 제공한 것은 이 달력이 디자인뿐 아니라 실용성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제작팀은 달력의 정보 구조도 세심하게 설계했다. 휴일 모아보기 페이지를 따로 만들어 맨 앞에 배치하고, 월별 색인을 통해 원하는 페이지를 빠르게 찾을 수 있게 했다. 휴일 모아보기 아이디어는 사용자 인터뷰에서, 월별 색인 아이디어는 카카오 내 디자인 조직에서 나온 아이디어라고 하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접근성 팀에서 이 달력의 디자인을 위해 얼마나 다양한 출처에서 의견을 수렴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인상적인 특징은 개인 일정을 기록할 수 있는 촉각 스티커다. 사용자는 점자 달력 맨 뒤에 있는 다양한 모양의 촉각 스티커들을 떼어와서 날짜 주변에 붙여 사용할 수 있다. 직접 메모를 할 수 없다는 한계를 모양과 숫자로 구성된 스티커로 어느 정도는 보완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스티커는 시각장애인이 일정을 표시하고 기억할 수 있게 하는 장치로 이 달력을 일방적인 정보 매체가 아닌 사용자가 참여할 수 있는 도구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카카오의 달력 배포 과정 역시 단순한 전달을 넘어섰다. 카카오 디지털 접근성 조직의 담당자들이 전국 14개 맹학교에 직접 방문해 시각장애 학생들에게 전달했다. 맹학교에 소속되지 않은 학생들에게는 유관 기관을 통해 달력을 전달했다. 나 역시 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 소속 시각장애인 교사의 한 사람으로서 이 달력을 받았다. 한정판으로 3,000부를 제작하였는데 이렇게 시각장애 학생 및 교사들에게 전달하고 나니 순식간에 달력이 동났다고 한다. 달력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달력은 단순한 물건이 아닌 소통의 매개체가 되었고 시각장애인들 사이에서 빠르게 입 소문으로 퍼져나갔다.

유독 이 달력이 시각장애인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이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사용자의 필요를 고려한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기능보다는, 실제 사용 과정에서 마주치는 작은 불편함까지 해소하려 했던 노력이 달력 곳곳에 배어있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우리의 필요를 귀 기울여 들어준 누군가의 세심한 배려처럼 느껴진다. 반갑게도, 카카오가 점자 달력 보급을 일회성 이벤트로 끝내지 않고 이용자들의 피드백을 수집해서 더 나은 버전을 준비한다고 하니. 내년에는 더 많은 시각장애인이 받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맺으며

 

처음엔 ‘그냥 종이 달력 하나 받았을 뿐인데…’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책상 한 켠을 차지한 이 달력은 곧 ‘시각장애인에게 달력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하여 느림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디지털이 주는 편의와 속도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지만, 동시에 물리적 존재가 선사하는 깊은 몰입과 사색이 왜 여전히 필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카카오 점자달력은 IT 기업이 아날로그를 활용해 보여 준 하나의 역설적 해법이다. 기술은 결국 사람을 위한 도구이고 반드시 디지털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흐르고, 그 시간을 어떻게 기록하고 기억할지는 개개인의 감각과 습관에 달려 있다. 스티커를 붙이고, 디지털 캘린더를 공유하고, 손끝으로 날짜를 더듬는 모든 방식이 존중될 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정보접근권’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을 것이다.

달력 표지에는 “카카오는 우리의 소중한 순간을 이어 일상의 흐름을 만듭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스티브 잡스가 말한 ‘점을 연결하는 것(connecting the dots)’과도 통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2025년 한 해 동안 이 달력에 촉각 스티커를 붙여 가며 내 삶의 순간들을 이어간다면 연말에는 하나의 아름다운 궤적이 완성되지 않을까. 그 설렘에 벌써부터 2025년 말이 기다려진다.


* 카카오 점자달력 소개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