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AI 음성으로 듣기 - ElevenLabs


3월이 되었다. 우리 부부는 교육 분야에 몸담고 있는 데다 올해는 도도가 어린이집에 처음으로 등원하기 때문에 이달이 꽤나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일상은 불완전한 선택과 시행착오의 연속이고 그날그날 해쳐 가야 할 일이 많아 버겁기만 하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는지 문득 지난 시절 우리 가족이 함께한 여행을 떠올려 보았다. 일상도 여행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행은 늘 우리 가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축이었다. 2017년과 2018년에 세 번에 나누어서 했던 마다가스카르와 모리셔스 여행은 연애 시기 유정과 내가 서로를 평생 함께할 동반자로 확신할 수 있게 해준 중요한 이정표였다. 그때 만난 도도새는 우리 아이의 태명이 되었고, 여행 중 쌓았던 수많은 추억은 이제 우리 가족만의 특별한 서사가 되었다.


코로나19가 사그라지던 2022년 봄에 방문한 제주도는 우리 부부에게 많은 추억이 깃든 곳이다. 우리는 7년의 연애를 끝내고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지였던 제주도는 아시아나항공 기내 방송 멘트처럼 “사랑과 낭만이 있는 섬”이었다. 그때의 황홀했던 추억을 맘 한 켠에서 만지작거리며 지난 12월에도 우리 가족은 제주도 여행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도도까지 셋이었다. 당시 생후 8개월이었던 도도는 비행기에서도 울지 않고 잘 버텨주었고, 숙소에서는 바닥을 열정적으로 기어다니며 우리 부부를 행복하게 해주었다(이 제주도 여행에 관해서는 시간이 허용하는 한 빨리 별도의 글로 풀어보려고 한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2023년 초의 쾰른-안트워프-암스테르담 여행은 또 다른 의미의 전환점이었다. 이 여행은 내가 실명으로 인해 30여 년 전 쾰른대학병원에서 눈 수술을 받았던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었다. 동시에, 새로운 꿈과 이상을 품게 해준 미래로의 여행이기도 했다. 유럽 도시들의 건축물과 문화적 풍경은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빛나는 순간들을 다시 한번 마주하게 해주었고, 유정에게는 이전까지의 회사 생활을 접고 출산을 결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2024년 4월, 우리는 도도를 건강하게 낳았고 도도가 타고난 복 덕분인지 유정도 2024년 말 교사로의 커리어 전환에 성공했다. 쾰른-안트워프-암스테르담 여행이 이 모든 행운의 시작점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도도의 탄생 이후에도 우리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지난해는 여름 방학을 이용해 평창과 계룡산으로 각각 1박 2일과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왔다. 비록 이전의 여행들에 비하면 짧은 거리였지만, 갓 신생아 시기를 벗어난 도도와의 첫 여행이었기 때문에 우리 부부에게는 꽤 큰 도전이었다. 시행착오가 없지 않았지만, 이제는 ‘여행의 달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유정 덕분에 새 식구와의 여행도 기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게다가 기어다니기도 전인 도도가 이렇게까지 협조를 잘해주는 것을 보며 우리 부부는 앞으로도 여행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여행은 개인 차원에서 그 자체로 잊을 수 없는 추억과 경험을 만들어 주고, 바삐 굴러가는 일상에 굵은 쉼표를 찍어줌으로써 숨 쉴 공간을 마련해 준다. 하지만 그동안 내게 여행은 개인보다는 공동의 경험으로서의 의미가 더욱 컸던 것 같다. 유정과의 여행은 매번 우리 둘의 관계를 다른 차원으로 데리고 갔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우리를 연결한 끈이 더욱 단단해졌고, 둘이서 더 큰 도전을 할 수 있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게 해주었고, 공동의 꿈을 꾸게 해주었다.


나는 유정을 ‘일상을 여행자처럼 살고, 여행을 일상처럼 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런 유정 덕분에 나도 넓은 세상을 탐험할 수 있었고, 내 인식의 지평도 함께 넓어졌다. 그리고이제는 도도까지 셋이 함께한다. 지난해에만 평창, 계룡산, 제주도로 즐거운 여행을 세 번이나 했다. 올해는 여행이 우리 가족을 또 어디로 데려갈까? 우선, 3월도 여행자처럼 유유히살아내면 좋겠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이 시기를 보내고 나면 여유롭게 또 다른 여행기를 써 내려갈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며 잠시의 상상 속 행복한 여행을 마무리한다.


※ 함께 보면 좋은 영상: 제리백에서 우리 부부의 여행 스토리를 멋진 영상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도도에게 들려주는 유정과 헌용의 모험] 프롤로그. 아빠가 도도에게

아빠에겐 여행이 꽤나 어려운 일이야. 흰지팡이가 없으면 집 밖에 한 발자국도 못 나가거든. 그런데 가끔은 흰지팡이가 있어도 길을 헤맬 때가 있어. 나갈 땐 괜찮은데 돌아올 때가 문제지. 종종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근처에서 의도치 않게 여행을 하곤 해. 엉뚱한 데 한눈을 팔다 보면 길을 잃는 거지(‘한눈 판다’는 표현이 아빠에겐 적절한지 모르겠구나!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다’는 뜻으로 쓴 표현이야). 그럴 땐 귀를 쫑긋 세우고 흰지팡이를 고쳐 잡아. 정처없는 나그네처럼 한참을 헤매다 보면 익숙한 지면이 발바닥에 느껴질 때도 있고 끝끝내 방향을 못 찾을 때도 있어. 못 찾을 때면 아빠는 엄마한테 영상 통화를 건단다. 엄마는 “헌용~”하고 외치면서 전화를 받지. 그리곤 카메라를 요리조리 돌려보게 한 후 길을 알려줘. 그럼 아빠의 여행은 안전하게 끝이 나는 거야. 무사히 집에 돌아오는 거지.


엄마는 아빠에게 늘 그런 존재였단다. 응, 그래. 내비게이션 같은 존재. 아빠가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하면 엄마는 길을 안내해주곤 했어. 그런데 엄마도 여느 내비게이션이랑은 조금 달라서 빠른 길을 알려주진 않았단다. 항상 아빠가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길로 데리고 가곤 했거든. 그렇게 아빠는 엄마랑 많은 여행을 했어. 응, 맞아. 엄마만의 여행 방식 있잖아. ‘유정 투어’. 엄마는 그게 세상을 재미있게 사는 방법이라고 했어. 남들은 목적지를 정하고 어떻게든 거기까지 빨리 가려고 하는데 엄마는 달랐지. 그렇게 갈 거면 택시를 부르라는 거야. 엄마랑 갈 거면 엄마가 하자는 대로 해야 해.


앞으로 쓸 글은 그렇게 아빠랑 엄마랑 유럽에 다녀온 내용을 정리한 것이란다. 2023년 1월이었어. 아빠가 유럽에 가고 싶은 이유는 하나였어. 생애 최초의 기억을 찾아가는 여행. 아빠는 그것만으로 족했지. 멋지지 않니? ‘기억을 찾아가는 여행’. 아빠가 세상을 볼 수 있을 때 마지막으로 본 것들이 거기에 있었어. 쾰른대성당의 첨탑과 라인강변. 그리고 그것들은 아빠가 나이가 들면서 기억 속에서 조금씩 흐려졌거든. 엄마랑 같이 그때로 돌아가서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었어. 그리고 정말 그렇게 했단다.


그런데 있잖아. 엄마랑 같이 여행을 간 이상 그걸로만 끝내기에는 너무 아쉬웠단다. 그때부턴 엄마에게 모든 걸 맡겼어. 신나는 아빠와 엄마의 모험이 그렇게 시작됐지. 이 글은 아빠가 유럽에 있는 동안 그리고 유럽에서 돌아온 후 페이스북에 올린 일기와 엄마가 여행하는 동안 남긴 이미지랑 영상을 주재료로 사용했어. 아빠는 텍스트에, 엄마는 멀티미디어에 강하거든. 아빠가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은 엄마가 명쾌하게 설명해 줄 거야.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도도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아빠랑 엄마가 얼마나 흥미진진한 여행을 했는지 알게 될 거야. 그리고 아마 도도도 같이 다시 가보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땐 우리 셋이 더 즐거운 모험을 떠나자! 훨씬 더 흥미진진한 모험을!

 

2024년 1월

사랑하는 아빠 헌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