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LG전자가 개발한 작지만 중요한 아이템, 점자 스티커 - 시각장애인 사용자라면 꼭 설치하세요. (워시타워 작동 영상 포함)

요약: 이 글에서는 3년 전에 가전의 접근성 개선을 기대하며 했던 노력들, 이번에 LG전자의 점자 스티커를 가전에 설치하는 과정에서 겪은 감동적인 경험, 점자 스티커의 종류와 부착 원리, 앞으로에 대한 저의 기대를 소개합니다.


들어가며


아기 도도의 출산을 기다리면서 예비 아빠로서 특별히 신경을 많이 쓴 분야는 가전의 접근성을 높이는 일이었습니다. 스마트 홈 구축을 위해 AI 스피커들도 연결하고 집 안에 있는 여러 기기의 사용법도 처음부터 다시 익혔습니다. 이제 곧 있으면 아이가 나올 텐데 집안일에서 버벅대면 안 되겠죠?


가전이 장벽으로 느껴졌던 3년 전...


문제는 몇 년 전부터 대부분의 가전이 버튼 없이 터치로만 작동하도록 개발되고 있다는 점인데요. 이것은 사실 시각장애인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만져지지도, 소리가 나지도 않는 가전 앞에서 시각장애인은 집안에서조차 소외되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3년 전, 저는 이 문제에 관해 언론에 칼럼을 기고하기도 하고 국가인권위에 장애인차별 진정을 넣기도 했었죠. 저의 페이스북 글을 본 강민정 국회의원님께서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장애인차별금지법」 개정안도 발의해 주셨습니다. 저의 활동은 아래 기사들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번엔 다를까?


당시에는 큰 반향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습니다. LG전자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스티커를 개발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스마트 홈 앱인 LG 씽큐(LG ThinQ) 앱에 음성 피드백 기능이 개선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거든요. 이른바 로테크(Low technology)에 해당하는 점자와 하이테크(high technology)에 해당하는 앱 활용을 잘 조합하면 가전을 조금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 모두를 가능케 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하는 것도 언제나 서비스입니다. 제가 인권위 진정을 넣었던 내용 중 하나는 LG전자에서 장애인 사용자에 대한 안내가 너무 부족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점이 얼마나 개선되었을지에 대해서는 큰 확신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검색해 보니 장애 감수성을 느낄 수 있는 LG전자의 블로그 글이 몇 편 나왔습니다.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좋은 징조였습니다.



사실 이런 마케팅은 중요합니다. LG전자가 장애인 등 다양한 사용자를 위에 어떤 것에 역점을 두고 있는지 보여주고, 고객 입장에서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심어 주니까요. 그래서 저는 바로 다음 날 LG전자의 대표 번호인 1544-7777번으로 전화를 걸었죠. 그러고 나서 경험한 일은 저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서비스는 시작부터 끝까지 감동이었다!


먼저, 고객센터 상담사는 매우 친절하게 저의 상황과 요구를 파악했고 필요한 정보를 수집한 후 저에게 콜백을 해 주었습니다. 저의 지역인 강동서비스센터에서 집에 직접 방문해 점자 스티커를 설치해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설치 당일, 놀랍게도 강동서비스센터 직원만이 아니라 LG전자 본부에서 연구원님 두 분이 함께 나오셨습니다. H&A사업본부 고객가치혁신기획파트 박세라 선임 연구원님과 이지연 연구원님이었습니다. 눈이 휘둥그레진 제가 어찌 된 영문인지 확인할 틈도 없이 세 분은 저의 손에 LG전자가 직접 개발한 점자 스티커 꾸러미를 쥐여주며 점자 스티커의 원리와 가전 사용법을 친절히 설명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박세라 선임 연구원님은 점자 스티커를 직접 개발한 분이셨습니다. 저처럼 많은 가전에 한꺼번에 점자 스티커를 설치하는 경우도 드물거니와, LG 고객센터에 점자 스티커 설치까지 신청한 사람은 제가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현장에서 고객의 만족도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방문해 보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보통은 점자 스티커를 배송받아서 스스로 설치하거나 가전을 구매할 때 설치 기사님이 붙여주고 가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잠시 LG전자가 자체 개발한 점자 스티커의 종류와 원리에 관해서 짧게 소개해 보겠습니다.


[사진: LG전자가 개발한 가전용 점자 스티커]

사진 설명: LG전자의 점자 스티커 세트. 검은색의 포장지 위에 투명한 플라스틱 재질의 점자 스티커 세트를 올려놓았다. 다양한 가전 제품의 기능을 나타내는 아이콘(예를 들어, 전원, 재생 및 일시정지, 플러스, 마이너스 등의 기호를 상징하는 아이콘) 등이 점자로 표현되어 있다. 포장지에도 ‘LG전자’라는 글자가 점자로 표시되어 있다.


스티커의 종류는 어느 제품에나 붙일 수 있도록 범용성이 있는 아이콘 모양의 스티커 10종, 0부터 9까지의 숫자 스티커 그리고 (이게 정말 혁신적인데) 손가락이 움직이는 길을 표시해 주는 직선 모양의 가이드라인 스티커, 이렇게 세 가지로 개발되어 있습니다.

스티커를 부착하는 원리는 먼저 손가락이 닿을 만한 위치에 아이콘이나 숫자 스티커를 붙이고, 거기서부터 터치 버튼까지의 길을 가이드라인 스티커로 표시해 주는 것입니다. 터치 버튼이 보통 기기 본체에서 매우 좁은 면적에 위치해 있고 살짝만 닿아도 작동이 되기 때문에 아이콘이나 숫자 스티커가 터치 버튼에 겹쳐서는 안 되고, 실제 버튼의 좌우 또는 상하 2cm 정도 떨어진 지점에 붙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가이드라인 스티커를 수직 또는 수평으로 정확히 붙여 줍니다.

이렇게 하면 시각장애인이 터치 버튼의 위치를 잘 모르더라도 점자 스티커를 따라가면서 원하는 터치 버튼을 한 번에 정확하게 누를 수 있습니다. (자세한 모양과 사용법은 게시물 하단에 있는 영상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박세라 선임 연구원님은 저의 집에 있는 가전을 하나하나 돌며 점자 스티커를 붙여 주기 시작했습니다. 점자 스티커의 모양과 기능을 상세히 설명하며 스마트폰 앱과 어떻게 연동이 되는지까지 확인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가전제품의 기능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만이 해 줄 수 있는 설명이었습니다. 점자 스티커를 붙이는 작업도 미세 작업이어서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이번에 저희 집에서 점자 스티커를 설치한 가전은 로봇청소기, 에어컨, 스타일러, 오븐, 냉장고, 식기세척기, 워시타워, 등 LG 가전 7종과 밥솥, 인덕션, 제습기, 가습기, 보일러 온도조절기, 그리고 나중에 제가 따로 설치한 AI 스피커 등 다른 브랜드 가전 6종까지 총 13종이었습니다. 이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LG전자가 개발한 점자 스티커는 꼭 LG 가전이 아니어도 집 안에 있는 어느 가전에나 사용할 수 있습니다.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어 보니 박세라 연구원님은 아이콘 모양의 스티커를 원래 30종 정도 개발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촉각 인지력을 고려하여 실제 패키지에는 10종만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10종은 직관적인 모양으로 디자인되어 있어서 밋밋한 터치 버튼을 불편해하는 모든 사용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점자 스티커가 의미하는 것은 점자 그 이상


집 안에 있는 거의 모든 가전에 점자 스티커를 붙이고 나니 3시간 정도가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시간을 내준 것이 너무나도 고마웠습니다. 단순히 감사한 정도가 아니라 3년 전 혼자 싸우면서 느꼈던 서러움까지 다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단순한 점자 스티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걸 개발하기 위해 선임 연구원님이 거쳤을 수많은 기획 회의와 시행착오가 예상되어서 더욱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제품의 완성은 서비스라는 사실 또한 깨달았습니다. 가전제품은 궁극적으로 물건이 아니라 서비스인 것 같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소프트웨어의 문제는 소프트웨어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IoT가 발달할수록 예상하지 못했던 접근성 이슈가 발생할 수도 있고, 반대로 장애인 사용자에게 획기적인 새로운 인터페이스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최근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인간과 기계 간의 상호작용이 더욱 직관적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언제까지나 기본은 충실히 지켜주어야 합니다. 점자 스티커는 시각장애인에게 스마트폰이 없이도 독립적으로 가전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고 스마트폰이 있다면 더욱 풍성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해줍니다. 점자는 어떠한 첨단 기술로도 대체할 수 없는 직관적 매체이고 다른 모든 수단을 보완·강화 하는 토대가 되어 줍니다.


이후에 조사해 보니 LG전자는 디자인과 서비스 모든 면에서 가전을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포함시키려는 ‘심리스 테크놀로지(끊김 없는 사용자 경험을 중시하는 기술 트렌드)’ 분야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많이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IoT 분야에서 국제 표준을 제정하는 단체인 CSA(Connectivity Standards Alliance)에서 최근에 의장사를 맡았던 것도 가전과 생활의 연결을 중시하는 LG전자의 접근방식을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러한 화려한 기술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오히려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점자 스티커와 같은 작은 디테일에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닌까 합니다. 진정한 ‘심리스’가 구현되려면 역으로 현재 가장 심리스하지 않은 경험을 하는 사용자의 어려움을 반드시 살펴봐야 할 테니 말입니다. 앞으로 많은 브랜드가 LG와 같이 접근성(accessibility)을 사용자 경험(UX)의 사례 스터디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바라봐 주었으면 합니다.


한편, 그런 의미에서 LG전자가 개발한 점자 스티커를 어떤 기업이든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공공 샘플로 공개하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일 것 같습니다. 소프트웨어 세계에서 오픈소스가 기술 발전을 촉진하는 것처럼 LG전자의 점자 스티커가 범용화되면 더 많은 시각장애인 사용자가 혜택을 누림과 동시에 다양한 기업의 접근성 기술 발전에 좋은 자극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오며


도도의 출산을 기다리며 집을 더욱 접근성 높은 공간으로 바꾸는 과정은 무척 즐거웠습니다. 도도가 나오면 집 곳곳에서 점자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 유정의 가사 부담도 조금이라도 더 덜어줄 수 있겠지요! 제가 아빠가 되어가는 과정은 시각장애인으로 살면서 늘 그랬듯 환경을 사소하게 변화시키는 것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도도에게는 장애인 아빠가 비장애인이 중심인 세상에서 ‘심리스’하게 통합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P.S.: 점자 스티커를 사용해서 워시타워를 작동시키는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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