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E 리뷰] 냉수는 되는데 온수는 왜 안 될까

기술의 발전이 눈부시다. 하지만 그 결실은 고르게 분배되지 않는다. 지난 3~4년간 AI의 급격한 일상 침투로 그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한쪽에서는 AI로 인력이 대체될 수도 있다고 우려하지만, 또 다른 한쪽에서는 아주 작은 일상생활도 기술 장벽에 의해 가로막힌다. 예를 들어, 상지 지체장애인이나 나 같은 시각장애인은 정수기에서 적정량 온수를 받는 것조차도 여전히 쉽지 않은 과제다.

5년 전 신혼 가전을 마련하면서 LG전자의 얼음정수기냉장고를 구매했다. 얼음을 얼리는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내겐 그 이상의 뜻밖의 이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정수 500ml 출수해 줘." 이렇게 말하면 정확히 그만큼 물이 나오는 것이다.

이건 나에게 작지 않은 혁신이었다. 이전까지는 라면의 물량을 맞추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음성을 통한 출수량 제어 기능 덕분에 더 이상 짜거나 싱거운 라면을 먹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이 편리한 기능이 일반적인 정수기에서는 반쪽만 작동한다. 온수에서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수기에 대고 "온수 150ml 출수해 줘"라고 말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법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국내 전기용품안전기준 KC 60335-2-21의 22.113항은 이렇게 규정한다.

"음용수 온수기는 이중 조작으로 온수가 토출되는 구조여야 한다."

취지 자체는 합리적이다. 화상 방지를 위해 두 단계에 걸쳐 조작하도록 한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조작'이 사실상 물리적 버튼만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음성 명령을 '조작'으로 인정하는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기준은 2007년에 제정되었다. 아이폰이 세상에 나온 바로 그 해다. AI 음성 인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의 규정이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규정 한 줄이 막고 있는 것들

나는 1년 전 LG전자의 볼드무브(Bold Move) 활동에 참여했다. 이때 이 구시대적 규정의 폐해가 어떤 것인지 처음 듣게 되었다. 참고로 볼드무브는 LG전자가 장애인과 노약자의 가전 사용 편의성을 개선하기 위해 만든 국내 최초(아마도 세계 최초) 장애인 사용자 커뮤니티다.

이 활동에서 전자제품 사용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정수기 온수 이야기가 나왔다. 손의 세밀한 제어가 어려운데 온수를 받으려면 버튼을 두 번 누르거나 동시 조작해야 해서 혼자 받기 어려운 사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 이것은 사실상 온수를 쓸 수 없다는 뜻이었다.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나도 온수를 받을 때면 늘 얼마간 긴장을 하고 있었다. 자칫 물이 넘쳐 흐를까 봐 조심스럽게 받는 것이다. 다른 시각장애인 지인들에게도 물어봤다. 다들 비슷한 불편을 안고 살고 있었다. 그제서야 너무 일상적인 불편이라 불편인 줄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역설적인 상황이다. 냉수와 정수는 음성으로 정확한 양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정작 화상 위험이 있는 온수에서는 음성 제어가 차단되어 있다. 더 위험한 쪽에서 오히려 보호 기술이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술은 이미 와 있다

수년 전만 해도 나는 옷을 고르거나 우편물을 읽으려면 사람을 불러야 했다. 지금은 아니다. Seeing AI, 챗GPT가 내 눈을 대신하여 상황을 말로 설명해 준다. 집 안에는 LG ThinQ 허브를 포함해 7개의 AI 스피커를 놓았다. 시간이나 날씨를 확인하는 기본적 기능뿐 아니라, 보일러 온도를 바꾸고, 세탁기가 다 돌아갔는지 확인하는 것까지 전부 음성으로 처리한다. 시각장애인에게 음성 인터페이스는 '편리'가 아니다. '자립'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다.

제조사 쪽도 준비가 되어 있다. LG전자를 비롯한 주요 기업들은 이미 높은 수준의 AI 음성 인식 기술을 갖추고 있고, 냉수와 정수에는 실제로 적용하고 있다. 음성으로 온수를 안전하게 제어할 기술은 이미 존재한다. 그런데 20년 전 규정이 그 기술의 적용을 막고 있는 것이다.

'규제 샌드박스'라는 도구

여기서 '규제 샌드박스'라는 제도를 소개하고자 한다. 아직 많은 사람에게 낯선 개념일 수 있다.

이름 그대로 '모래놀이터'다. 아이들이 모래놀이터에서 자유롭게 노는 것처럼, 기존 규제를 일정 기간·일정 범위 안에서 면제하고 새로운 기술이나 서비스를 실제 환경에서 시험해 보게 하는 제도다.

핵심은 '규제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증거를 모으는 것이다. 통제된 조건에서 실증 데이터를 쌓는다. 그 데이터를 근거로 기존 법을 바꿀지 유지할지 판단한다. '잘 모르겠으니 일단 금지'도 아니고 '너희를 믿고 모든 걸 맡긴다'도 아니다. 감이나 추측이 아니라 데이터로 규제를 섬세하게 설계하는 장치가 바로 샌드박스다.

해외에서는 이 도구가 이미 활발하게 쓰이고 있다. 특히 접근성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사례가 여럿 있다.

미국부터 보자. 안전 인증 기관 UL은 지난 2025년 6월 가정용 전기레인지 기준(UL 858)을 개정했다. 이전에는 금속 표면의 최대 온도가 33°C를 넘으면 안 된다거나, 최대 화력으로 30분간 주철 팬에 담긴 식용유가 발화하지 않아야 한다는 등의 물리적 기준만 있었다.

하지만 최신 개정판에서는 스마트 기기의 원격·음성 제어를 공식 허용하면서 새로운 종류의 안전 기준을 추가했다. 예를 들어, 인터넷이 끊기면 기기가 스스로 꺼지도록 하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가 해킹되지 않도록 암호화를 의무화하고, 기기 오작동 시 집안의 차단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까지 검증하도록 했다. 안전의 기준 자체가 바뀐 것이다. '사용자가 버튼 앞에 서 있는가'가 아니라 '시스템이 위험을 감지하고 스스로 차단하는가'가 핵심 질문이 되었다.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안전 장치도 함께 발전하도록 개정한 것이다.

EU도 AI 기본법에 의미 있는 샌드박스 규정을 두고 있다. 제59조는 규제 샌드박스 안에서 개인정보 활용의 특례를 둔다. 공중 보건, 교통·이동성, 환경 보호 같은 공익 목적의 AI를 개발할 때, 원래 다른 용도로 수집된 개인정보를 샌드박스 안에서 재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장애인의 이동권이나 건강 관련 AI도 이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물론 데이터 격리, 접근 제한, 실험 종료 시 삭제 등 10가지 엄격한 조건이 전제된다. 개인정보보호에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EU조차도, 공익을 위한 AI 혁신에서만큼은 통제된 실험의 여지를 열어둔 것이다.

가까운 일본은 더 과감하다. 일본에서는 2017년부터 자율주행 전동 휠체어의 실증이 시작되었다. 목적지를 지정하면 휠체어가 알아서 이동하고, 내린 뒤에는 빈 상태로 대기 장소까지 자동으로 돌아가는 방식이다. 2020년 하네다공항에서 세계 최초로 정식 서비스가 시작되었고, 이후 간사이·나리타·오사카 공항으로 확대되었다. 주 이용자는 거동이 불편한 고령자와 장애인이다.

이런 실증 과정에서 축적된 데이터를 근거로 2022년 도로교통법이 개정되었다(2023년 4월 시행). '이동용소형차'라는 새 카테고리를 만들어, 장애 유무와 관계없이 전동 휠체어 규격의 이동 수단을 보행자로 인정한 것이다. 이전에는 매번 경찰의 개별 허가가 필요했지만, 개정 후에는 사전 신고만으로 일반 도로 주행이 가능해졌다. 아직은 공항과 일부 시범 지역 중심이지만, 법이 바뀌면서 역 주변이나 상점가 같은 생활권으로 실증이 확대되고 있다. 실험이 법을 바꾸고, 바뀐 법이 다시 실험의 범위를 넓히고 있는 것이다.

이 사례들의 공통점이 있다. 먼저 통제된 환경에서 시도하고, 데이터를 쌓는다는 점이다. 그 데이터로 법을 바꾼다. 규제가 혁신의 벽이 아니라 혁신의 검증 도구가 되는 것이다.

온수 한 잔에서 시작하자

정수기의 온수 음성 제어가 사소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기능 요청이 아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질문이다. 물리적 버튼만을 '조작'으로 인정하는 20년 전의 프레임을 언제까지 유지할 것인가.

이 프레임이 바뀌지 않는 한,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손이 불편한 사람,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 정수기 앞까지 갈 수 없는 사람은 계속 배제된다. 정수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물리적 접촉이 전제된 가전이라면 어디서든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이다.

한 가지 장애인 당사자로서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안전과 개인정보 보호는 양보할 수 없는 가치라는 점이다. AI 스피커가 수집하는 데이터가 어디로 가는지, 장애인의 음성 패턴 같은 민감 정보가 어떻게 쓰이는지, 그 투명성은 지금보다 더 강화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는 타협이 없다.

그러나 그 우려를 이유로 20년 된 규정을 방치하는 것은 '신중함'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라. 사용자가 "온수 150ml 출수해 줘"라는 음성 명령을 한다. 기기가 "온수를 출수할까요?"라고 확인 질문을 한다. 사용자가 "응, 출수해"라고 대답하면 출수하고, 이상이 감지되면 즉시 중단된다. 이 시스템은 물리적 버튼을 두 번 누르는 것보다 오히려 더 안전할 수 있다. 규제 샌드박스는 바로 이 가능성을 실제로 테스트하기 위해 존재하는 제도다.

산업 중심으로 발전하는 AI는 그 자체로는 방향이 없다. 그 기술이 장애인, 노약자,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데 쓰일 때, 기술의 혜택은 비로소 고르게 재분배된다. 그것이 기술이 사회 평등에 기여하는 가장 구체적인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온수 한 잔이면 충분하다.


[*] 추기 (2025. 2. 14.)

이 글을 게시한 후 KC 60335-2-21의 제정판부터 최신 개정판(2025년)까지를 직접 대조하여 확인했다. 본문에서 22.113항이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고 서술했는데,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어 바로잡는다.

판본 22.113항
2007년 제정 도입
2012년 개정 (K 60335-2-21) 존재 (본문 p.10)
2015년 개정 존재 (한국 국가차이 p.24)
2022년 개정 삭제
2025년 개정 삭제 유지

22.113항("음용수 온수기는 이중 조작으로 온수가 토출되는 구조여야 한다")은 2022년 개정에서 삭제되었다. 현재 이 조항은 적용되고 있지 않다.

다만 규정이 삭제된 후에도 업계에서는 관행상 이중 조작 방식을 유지하고 있으며, 더 근본적으로는 음성 제어와 같은 새로운 기술을 안전한 '조작'으로 인정하는 기준 자체가 아직 없다. 제조사가 음성 제어 온수 출수를 도입할 수 없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 글은 LG전자 볼드무브(Bold Move)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