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디지털 교과서는 왜 실패했나?
1. AIDT의 결정적 패착은, 교육부가 정점에 선 중앙집권적 거버넌스 구조에 있었다.
2. AI가 열어주는 교육의 가능성은 분산성과 탈중심화, 그리고 학습자가 주체가 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3. 그러나 AIDT의 설계, 심사, 배포의 전 과정에서 교사와 학생은 배제되었다. 분산도, 탈중심도 없었다. 오직 교육부와 출판사·개발사만 있었다.
4. 이에 더해, AIDT는 교육부가 독점해 온 교과서 콘텐츠 편집 권한과 결합해, 교육을 더욱 획일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콘텐츠와 툴이 완전히 결합되며, 중앙통제의 완결판이 된 것이다.
5. 그 결과는 AI를 활용한 교육이 아니라, AI를 명분 삼아 기존 교육 방식을 디지털 방식으로 고착화한 것에 불과했다.
6. 압축하면, AIDT 강제는 통제 기반의 거버넌스가 자율적 학습 생태계의 가능성을 압살한 사건이었다.
AI 디지털교과서는 잘못되기만 했나?
7. 그런데 위 주장에는 강력한 안티테제가 존재한다.
8.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중앙집권적이고 통제적인 거버넌스였기 때문에 AIDT 정책에 장애학생과 장애인 교원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었다.
9. KERIS가 2023년 9월에 배포한 「AIDT 개발 가이드라인」에는 “제8장 UDL 및 접근성”이 별도 챕터로 들어갔다. 이 내용은 바로 2024년부터 검정 심사 기준이 되었고, 모든 출판사/개발사가 강제로 최소한의 접근성 기준을 충족해야만 하는 강력한 제도적 수단이 됐다. KERIS는 뿔 난 출판사/개발사들을 달래주기 위해 2025년, 개발 업무 담당자들이 실질적 컨설팅을 받을 수 있는 웹 접근성 테스트랩을 개관하기까지 했다.
10. UDL+접근성 기준의 가이드라인 삽입에서 컨설팅 테스트랩 구축까지, 이런 체계적인 포용적 조치는 우리나라의 공공 발주형 기술 사업에서 단 한 번도 시도된 적 없는 대담한 조치였다.
11. 이 정도의 강제적 조치는 다수의 이해관계자가 자율적으로 협의하는 느슨한 구조에서는 도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획일적이고 위계적인 구조였기에 가능했다. 통제 기반 거버넌스가 자율성을 억압했지만, 동시에 포용의 공간을 연 것이다. 우리 사회처럼 생존의 논리가 모든 가치를 덮어버리는 곳에서는, 이런 방식만이 취약계층에게 유일한 안전망이 되기도 한다.
12. 이것이 AIDT가 던지는 통제와 포용의 역설이다.
민주당이 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13. 그렇다면 민주당이 주도하는 AIDT 교육자료 격하 법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4. 민주당이 발의한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의 핵심은 ‘교육자료’ 범주를 신설해, AI 디지털교과서 등 지능정보기술을 활용한 학습지원 소프트웨어 및 전자 저작물을 모두 교육자료 에 해당하도록 규정하는 것이다. 즉, AIDT의 껍데기를 바꾸는 법안이다.
15. 껍데기가 바뀌면 AIDT는 각종 규제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 대신 치열한 시장의 경쟁을 뚫고 스스로 학교로 들어가는 판로를 개척해야 한다.
16. 요컨대, AIDT의 성격을 공공재에서 상품으로 바꾸는 것이다.
17. 4일, 이 법안이 본회의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민주당의 접근은 무엇이 잘못됐나?
18. 나는 이런 민주당의 ‘이전 정권 정책 백지화’식의 무차별적 폐기는 오히려 교육 현장에 혼란만 가중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19. 게다가 교육의 공공성보다는 상업성을 강화하는 방향이다. 그 효과성에 대해선 찬반 논란이 있겠지만 내가 관심 있는 거버넌스 개선과 포용성 증대 차원에선 분명한 역행이다.
20. 당장 가이드라인에 명시된 UDL 및 접근성 기준을 포함해 학생 및 교사 권리 보장을 위한 각종 규제가 모두 무효화될 것이다. KERIS가 개관한 테스트랩은 문을 닫을 것이고, 출판사/개발사들에 포용적 의무를 부과할 어떠한 정책적 수단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21. 검정심사제로 대표되는 경직된 하향식 교과서 정책을 교사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교과서 자유발행제로 전환하는 근본적 개혁은커녕 현재 교과서 정책의 문제점을 개선할 동력조차 일어버릴 것이다. 현장은 교과서와 교육자료가 따로 노는 개판이 될 것이다.
22. 요컨대, 민주당에겐 AIDT 사태로 드러난 대한민국의 교육 거버넌스가 지닌 하향식, 중앙집권적 구조를 바꿀 비전도 없으며, 그렇다고 교육 취약계층 학생과 나와 같은 소수 장애인교원을 보호할 의지도 없다.
23. 한마디로 민주당에는 대안이 없다. 나태한 법안뿐이다.
무엇이 남나?
24. 교육자료로 격하된 AIDT는 치열한 시장의 경쟁을 거치겠지만 어쨌든 학교로 들어올 것이다. 이미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진 상태여서 그렇다. AIDT는 살아남을 것이다. 아무런 규제도, 정치적 압력도 받지 않는 형태로.
25. 출판사/개발사들은 AIDT가 평가와 입시에 활용되도록 로비할 것이다. 그래야 수익성을 담보할 수 있으니까. 각종 판촉물이 남을 것이다.
26. 출판사/개발사들은 교육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이다. 교육부에는 빚이 남을 것이다. 빚은 다른 교육 예산의 축소를 가져올 것이다.
27. 그리고 장애학생 및 장애인교원의 눈물이 남을 것이다. 국가가 아닌 출판사로, 개발사로, 국회로 향하는 허망한 발길만이 남을 것이다.
28. 새 정부의 교육부 차관은 이것들을 “약간의 혼란”이라 명명했다. 묻고 싶다. 그렇게 가벼이 볼 일인지.
29. 내가 보기에 남을 것은 출판사/개발사들의 비건설적인 경쟁, 공공의 빚, 소수 약자의 절망뿐이다.